우리가 느끼는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흔히들 30대에는 30마일, 60대에는 60마일의 속도로 시간이 지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물리적 시간의 단위가 달라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식의 작용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나이가 들어 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주변의 자잘한 일들이 별로 새롭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항상 그래 왔던 일들이다 보니 정보처리가 쉽게 이뤄진다. ‘그 밥에 그 나물’인 세월의 풍경이다. 이런 이유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한층 더 후딱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첫 경험이고 새로움이다. 새로움을 인식하고 뇌 속에서 이것을 정보로 처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어떨 때는 오히려 좀 더 빨리 시간이 갔으면 싶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올 한해 당신이 느낀 시간의 속도감은 어떠했는가. 모르긴 해도 아주 길었던 한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이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평탄한 시기보다 버거운 도전과 위험에 직면했을 때 시간의 단위는 더욱 잘게 느껴진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상황과 맞닥뜨리는 바람에 마음고생, 돈고생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만큼 2008년은 간단치 않았으며 크나큰 위기와 그로 인한 불안감에 마음 졸여야 했던 시간의 연속이었다.
연말을 맞아 한국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올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물었더니 ‘마음속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몸가짐을 조심한다’는 뜻의 ‘은인자중’(隱忍自重)을 고른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 속에 미국이라 해서 마음가짐이 다를 수는 없다. 경제위기는 개인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하나, 통제가 가능한 것은 스스로의 마음가짐뿐이다. 그렇게 보면 작금의 상황에서 ‘은인자중’이야말로 아주 적절한 다짐이 아닐 수 없다.
금년 한해를 돌이켜 보면 유형 자산 면에서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쓰나미처럼 엄습한 경제 위기로 거의 모든 투자가 엉망이 돼 버렸다. 부동산 시장의 경우 2조달러에 가까운 가치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주택의 가치를 금값을 단위로 산정해 보면 한층 실감이 난다.
1970년대 미국의 중간가격 주택을 사려면 금 700온스의 값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는 달러화가 강세였고 금값은 최저치를 기록한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 중간 주택은 금 200온스 가격이 채 되지 않는다. 주택 가격은 폭락하고 달러 약세로 금값은 온스 당 800달러를 훨씬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금값을 기준으로 본 주택 가치는 1970년대의 3분의1에도 훨씬 못 미친다.
주식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S&P 500지수로 볼 때 이들 500개 기업의 가치는 지난 1년 새 6조 달러 이상 증발해 버렸다. 전체 주식시장으로 본다면 정확한 산정이 힘들 정도이다. 형태와 액수는 다를지라도 이런 와중에 예외 없이 모두가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잃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형 자산은 오히려 늘었다. 위기를 지나면서 ‘살아 있는 사유’를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유’는 책속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부대끼면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멈추지 않는 탐욕이 초래한 결과를 목도하고 그 여파로 인한 직격탄을 맞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다.
의식과 마음 씀씀이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흔히 ‘정신경제’라고 부르는데 가령 인간관계가 폭넓은 사람은 그 대신 깊은 관계를 맺기가 힘든 것 등이 그런 사례이다. 욕심에 한참 정신 팔려 있을 때는 다른 가치 있는 것들에 눈을 돌리기 힘들다. 탐욕의 몰락은 이런 사실을 깨우쳐 준 계기가 됐다. 이것을 경제 용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정신경제의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분산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우칠 수 있었던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금년에 얻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흑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통찰력 있는 현존 역사학자들조차 자신들의 생애에는 볼 수 없으리라고 했던 사건이었다.
이런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고 또 그런 역사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다. 어느 크레딧 카드 광고 문구처럼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경험이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이런 경험들이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라도 ‘담대한 희망’을 안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한해를 차분히 돌아보면서 결산하는 계절이다. 지난 1년이 적자였는지 아니면 흑자였는지 결론은 어느 자산에 가중치를 두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 이것은 숫자가 아니라 자세와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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