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뜻을 세우는 데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경구를 2009년 새 일기장의 두 번째 페이지에 여전히 써 둘 작정이다.
아마 햇수로 10여 년 이상 적어둔 구절이다. 카피용지 사이즈의 보드라운 습자용지로 된, 매일 한 장 씩 떼 내는, 지금은 구경조차 힘든 그런 달력의 어느 날에서 처음 이 명언을 발견하곤 그해의 일기장에 적어 넣으려고 할 때 무척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무슨 뜻을 세우며 무얼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들었고,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하신 것처럼 습자용지의 달력을 반씩 잘라서 코를 풀거나 재래식 화장실 벽 대못에 걸어두고 볼 일 볼 때나 쓸 용도이지 그 말을 한 ‘볼드윈’이란 사람을 외우며 고이 간직해 1년 동안 펼쳐볼 일기장에 적어두기에는 유치한 느낌도 좀 들었다. 여러 핑계거리가 생각 났지만 그래도 이 말은 너무 멋져서 결국 일기장 두 번째 페이지를 매년 차지하였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8년은 이제 끝난 셈이다. 12월은 결산의 시기이고 내년의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다. 매년 12월에 하루 한 페이지를 쓰게 되어 있는 양지사의 ‘유즈어리 일기장’을 마련한다. 일기장 첫 페이지 위부분에 적힌 것은 야베스의 기도였던 적도 있고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일 때도 있었다. 2008년 수첩에는 신명기 28장중의 한 구절이었다. 첫 페이지 아래에는 항상 시편 91편이 자리하고 있다. 새 일기장을 넘기며 내년의 나날들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구상해 본다.
올해가 시작될 때 만선의 부푼 꿈을 안고 항해에 나섰지만 몇몇을 제외한(만약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 빈 배로 돌아왔다.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폭풍이 불어 돛이 부러지고 암초에 부딪쳐서 부서진 배로 귀향한 이들도 있다.
풍년이 있었다면 당연히 흉년도 찾아오는 법이고 싫지만 이 또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년도 흉년이 예상되는 바 무얼 잔뜩 끌어 모으려 애쓰기 보다는 유유자적한 마음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관조하는, 그야말로 ‘소유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두는 삶에 목표를 두어야 할 것 같다.
“삶이란, 그 사람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 속에 있다”고 에머슨이 말했다. 각자의 생각이란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뺏어갈 수도 없는 고유의 재산이다. 남과 비교하여 결핍의 감정, 패배의 감정에 휩싸여서 귀중한 삶을 낭비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몫이다.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아닌지, 현재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에머슨이 가르쳐준다.
금년에도 젊은이는 질병으로, 연세가 드신 분은 노쇠로 인하여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내 잊혀져버렸음을 알고는 미어질듯 가슴이 아프다. 우리의 삶이 절대자의 섭리 아래 있다는 사실에 순종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반면 젊은 가정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있었다. 순결한 미소를 머금고 요람에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기적을 감지한다. 우리 모두가 아름답고 순결하고 경이롭고 기적같은 탄생으로 출발했던 삶이 어느새 욕심과 대부분 버려야 할 쓰레기로 가득 채운 머리로 혼돈의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생명의 탄생은 존재의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 헤겔이 <법철학 강요>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철학은 한참 뒤늦게 오고 깨달음도 모든 사건이 일어난 후 사건이 역사가 되어버릴 즈음 뒤늦게 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인간의 이성이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못함을 이 구절을 인하여 절절이 통감한다. 신의 존재에 다가가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삶이 미망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절대자의 구원을 의지하여 경거망동을 삼가고, 자중자애하고, 담담하게 어떻게 되어갈 지를 반석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현실의 삶은 훨씬 쉬울 것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양지사의 ‘유즈어리 일기장’은 소중한 벗이 되며 자아를 성찰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어쩌다 떠오르는 기억만 간직하지 않고 언제나 펼쳐볼 수 있는 일기장에 기억하고 싶은 감정들, 순간들, 나날들을 기록할 것이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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