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이 막 문을 닫으려는 데 한 여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리고는 문을 붙들고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여러분들 오버타임 임금은 내가 지불할 게요”
곧 이어 한 학생이 아버지와 함께 들어와 봉투를 내밀었다. 그 날짜 소인이 찍혀야 접수가 되는 대학입학 원서였다. 몇 년 전 실제로 있었던 한 한인가족의 이야기이다.
지금 12학년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런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을 것이다. 원서마감일은 바짝바짝 다가오는 데 아이는 미적미적 미루기만 하고, 부모는 속이 타지만 아이 역시 신경이 날카로우니 재촉도 못하고 - ‘자식이 상전’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날 때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대학은 보내야겠고 “내년이면 집 떠나 얼굴도 못 볼텐 데…”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져서 답답하고 화나도 꾹꾹 참으며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입학원서 시즌의 부모들이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까지 준비 안 된 원서를, 급한 대로 엄마/아빠가 대신 써넣기도 하며, 뒤늦게 부탁한 추천서들을 가까스로 챙겨서, 우체국 문 닫을세라 분초를 다투며 달려가 원서를 우송하도록 아이를 ‘보좌’하는 것이 우리의 자식 사랑이고, 교육열이며, 부모로서의 헌신이다.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편할 텐데 우리는 왜 그러지를 못하는 걸까.
불안 때문이다. 혹시라도 뭔가 잘못 되어서 아이가 대학에 못 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한 단계라도 높은 대학에 들어가야 할텐데 하는 초조감이다. ‘명문대학=출세’라는 뿌리 깊은 한국적 사고방식,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생존의식이 심리적 배경이 될 것이다.
첫 아이가 대학진학을 앞둔 40대 주부는 말했다.
“아이의 실력이 아주 특출하면 모를까 중상 정도면 불안해요. 해마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대학의 합격심사기준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하지요”
지난해 그의 친구 딸은 SAT 2200, GPA 4.2에 과외활동, 봉사활동도 할 만큼 했는데 UC 상위권 대학들에서 떨어졌다고 그는 전했다. “대학별로 성적이나 과외활동이 어느 수준이면 합격이다”는 기준이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기댈 곳을 찾기 마련이고 한인부모들에게 그 곳은 학원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대학진학 앞둔 자녀를 SAT 학원에 한두번 안 보내는 ‘간 큰 부모’는 거의 없다. 비용은 나중 문제다.
앞의 주부의 경우 남매가 11학년, 12학년 연년생이어서 지난여름 둘을 SAT 학원에 보내니 5,000달러가 들었다. 아울러 SAT II 준비를 위해 한두 과목 등록을 하고 나면 학생당 학원비가 수천달러는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빠듯한 살림에 이런 추가경비는 그대로 카드빚이다.
부모들의 불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12학년생 엄마에게 “아이가 원서 준비하느라 바쁘겠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그건 옛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학원에서 에세이는 물론 원서작성까지 대행해줘서 신경 쓸게 없다는 것이었다.
“원서접수 할 때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엄마들은) 아이가 못 미더운 거예요”
인생은 살아본 만큼 알 수가 있다. 그 당시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면 훤히 보이곤 한다. 자녀의 입학원서를 놓고 바작바작 속 끓이는 ‘후배’ 부모들을 보며 수년전 똑같은 경험을 거친 ‘선배’ 부모들은 대개 말한다.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더라. 결국은 자기 능력대로 간다”고.
12학년생과 학부모들에게는 지금 대학진학이 가장 높은 고지이다. 마라톤의 결승점이다. 하지만 그곳에 올라가보면 고지 너머로 더 높은 고지들이 구비 구비 이어져있다.
학원에서 수도 없이 반복한 덕분에 따낸 시험성적, 남이 써준 원서와 에세이가 고지까지 올라가는 ‘티켓’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어쩔 것인가. 마감 시간에 맞춰 원서를 쓰고 챙기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 준비성 혹은 시간관리 습관도 없다면 어떻게 대학공부를 따라 갈 것인가.
부모가 할 일은 억지로라도 밀어 올려서 자녀를 고지로 올려놓는 것이 아니다. 집 떠나 그 너머 험난한 고지들을 혼자 힘으로 버텨낼 ‘체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남들 모두 가는 학원에 자녀를 안 보내는 부모가 ‘간 큰 부모’가 아니다. 자녀를 매사에 의존적으로 길러서 허약체질로 내보내는 부모야말로 ‘간 큰 부모’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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