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에는 재미있는 세계 지도가 있었다. ‘재미’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눈에 그럴 뿐 당시로서는 진지하고도 엄정한 지도였을 것이었다.
중세 지도에서 세계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한 덩어리로 대륙을 이루고 그 주위를 대양이 O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둥근 대륙 안에서는 다뉴브강과 나일강이 수평으로 흐르면서 수직으로 흐르는 지중해와 T자를 형성해 T-O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지도의 가운데와 꼭대기이다. 지도의 중심, 즉 세계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이 있고, 동쪽 끝에 해당하는 지도의 맨 꼭대기에는 에덴동산이 있다.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에덴동산이 실재한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었다.
유럽인들이 끊임없이 아시아를 향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했던 심리적 배경에는 잃어버린 낙원을 찾으려는 의식적, 무의식적 욕구가 깔려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아메리카가 건설된 것도 알고 보면 에덴동산에 대한 꿈 덕분이었다.
콜럼버스의 본래 목적지가 인도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콜럼버스는 중세 지도에 담긴 전설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동쪽으로 가면 지상낙원이 있다는 믿음으로 항해를 했는데 결국 엉뚱한 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콜럼버스는 자신이 낙원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이후 수세기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인들이 현실의 어려움에서 탈출해 꿈을 실현하는 실제적 낙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낙원이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백인들이 생각하는 ‘우리’만의 몫이었다. 동쪽의 지상낙원을 염원하던 중세 유럽에서나 아메리카라는 위대한 신대륙에서나 이교도, 이민족 등 ‘그들’은 가차 없는 폭력과 응징으로 내치고 억누를 대상일 뿐이었다.
인류의 역사, 가깝게는 아메리카의 역사는 기득권 집단의 ‘우리’라는 울타리를 그 바깥의 변두리 집단들이 피나는 싸움으로 한 뼘 한 뼘 늘려온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흑인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 사회가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인종’이라는 울타리를 드디어 완전히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 안에 2/3 쯤 몸을 들여놓도록 허용했던 유색인종에게 미국사회는 이번에 확실하게 빗장을 열어주었다. 의식이 한 단계 올라선 것이다. 위대한 의식의 진화이다.
역사 속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있다. 중세의 세계 지도를 보며 ‘무지하다’고 웃을 일이 아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지 않아 볼 수가 없었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 눈을 뜨고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를 외치며 노예를 부렸고, 헌법에 ‘평등’을 명시하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치의 모순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노예나 흑인, 혹은 여성은 ‘우리’ 즉 시민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눈은 많은 경우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의식이 열려야 비로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성별과 피부색이 달라도 모두 똑같이 사람이라는 단순명료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의식의 빗장이 하나하나 열리기까지 참으로 많은 피땀과 시간이 필요했다.
뉴스에서 ‘대통령 당선자 오바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감동으로 가슴이 뛴다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 당선자’라는 말 뒤에 ‘오바마’가 따라붙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당선으로 ‘인종문제’라는 긴 챕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새 날이 밝은 것이다.
흑인 민권운동의 가장 대표적 사건은 로사 팍스 여사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앉아 있었던 사건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민권행진이다. 그 내용을 담아 이런 이메일이 돌고 있다.
“1955년 로사 팍스가 앉았고(sat),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걸었으며(walked), 2008년 버락 오바마가 후보로 뛰었다(ran). 이제 우리 아이들은 날게(fly) 될 것이다”
흑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종을 초월해 모두가 ‘우리’로 포용되는 미국에서 우리 한인 자녀들도 지금보다 훨씬 튼튼한 날개를 달게 될 것이다. 의식의 빗장을 열어젖히니 새로운 희망의 바람이 불어든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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