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준 지 사흘만 지나면 곧 뽑아버려야 될 것처럼 잎과 줄기가 시들어 죽는 시늉을 했다. 일터로 나서다가도 가방을 내려놓고 물을 한바가지 끼얹었다. 그러면 금방 생생한 잎으로 되살아나기를 반복했다. 물만 주면 까탈스럽지 않게 무럭무럭 자랐지만 꽃은 피우지 않았다. 옆자리의 제라늄 화분은 2주에 한 번 물을 주어도 언제나 즐거운 표정으로 일년 내내 빨강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데 질투심도 없는지 그냥 그대로 뻣뻣하게 꽃 피울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작년 가을 큼직한 세숫대야처럼 생긴 토기에 여러 가을꽃을 심은 화분 하나를 샀다. 귀퉁이에 자잘한 보랏빛 꽃잎이 예쁜 들국화도 심겨 있었다. 추위가 오자 모든 꽃은 시들어 죽었다. 잦은 겨울비 내린 후 봄이 오자 죽었던 들국화의 새순이 쑥 잎처럼 살며시 올라왔다. 화분이 어울리지 않아 요강처럼 생긴 오목한 화분으로 옮겨 심었다. 조금 더 자라면 금방 꽃이 피려니 생각하곤 삼일마다 물을 주며 기다렸다. 이제나 저제나…
그 들국화가 가을이 깊어 찬바람 부는 늦은 시월에 드디어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초라한 행색의 들풀에 들인 품이 그동안 얼마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들국화로 인하여 삼일이 넘는 여행을 지난 일 년 동안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삼일마다 물 줄 생각을 했으니 넋이 나갈 정도로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 삶은 아니었음을 떠올린다.
깊어가는 가을날 들국화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도 해본다. 일터는 남들처럼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한가한 시간을 틈타 나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즉 돈으로 꼭 사야할 것이 무엇인가 자문해 보았다. 이내 필요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데 미식가가 아니니 최소한의 식량만 있으면 되고 그 외에는 정말 절실한 것이 없음을 알았다. 좋은 옷? 이미 있는 옷으로도 충분하다. 청바지 한 벌, 카키바지 한 벌, 몇 가지 티셔츠와 치마, 지난 10여년 동안 산 정장 서너 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옷이 해어져서 못 입는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러고 보니 백화점에 가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누구나 삶의 원동력이 되는 욕구가 있는데 너의 욕구는 무엇인가 묻는다면 ‘세상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과 품격 있고 고상한 인간이 되어보고 싶은 욕망이다. 후자는 뜻과는 달리 실상은 저자거리 소상인의 지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모자란 것이 너무 많기에 지향점은 그분처럼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다.
하루 종일, 일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주 일터에 갇혀 사는 사람이 세상을 관찰하는 데는 제약이 있다. 하지만 직업상 책을 좀 읽는데 이것이 세상을 아는 데, 자신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주일날은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그림 전시회를 종종 찾는 것도 세상을 아는 방편이 된다. 박물관의 기획전시회는 빠짐없이 관람하는 편이다. 특별 기획전시회는 화가뿐 아니라 큐레이터가 의도하는 우리의 삶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런 것을 알아채면서 관람하는 묘미도 있다.
하찮은 인간의 재촉에는 아랑곳하지 않다가 신이 정해준 시간이 되어야만 비로소 꽃을 피우는 들국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세상을 아는 한 방편이 된다. 우리 맘대로 시한을 정하여 이런저런 궁리를 하지만 세상 만물에는 정해진 때가 있음을 들국화를 보면서 깨우친다. 부모가 자식에게 거는 기대도 이와 같지 않을까. 최선의 사랑과 관심을 쏟을 지라도 자녀들이 그들의 역량을 꽃 피울 때는 우리가 바라는 그 때가 아닌 적절한 시기가 있을 수 있음을 들국화를 인하여 유추해 본다. 조급한 성격을 버려야 된다는 세상 이치를 배운다.
어수선한 세월 탓으로 가을날의 찬바람이 더욱 차게 느껴지지만 활짝 핀 들국화처럼 어깨를 쭈욱 펴고 ‘시원하게 정신이 번쩍 드니 활기차게 보내자’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비록 내세울 것 없지만 나만의 주관과 나만의 개성으로 나만의 세계 속에서 남들이 의아해 할 만큼 재미있게 살자고 다짐한다. 연약한 들풀에 보랏빛 꽃이 핀 모습을 바라보니 기억 저편 시월의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노랑, 다홍, 갈색으로 물든 잎들을 싣고 소리죽여 흐르는 강가의 가을 해질녘 한 때가 그립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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