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14살 때야! 영어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나를 비웃는데 너는 내 역성을 들기는커녕 그 사람보다 더 흠을 잡으면서 낄낄거리고 웃어댔잖아!”
아빠는 분노로 터져 버릴 듯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며 고함을 지른다. “아빠는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구” “그게 생각 안 난다구? 차, 세워!”
아빠는 차가 서자마자 주먹을 쥐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아들은 억울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뒷좌석에서 자다가 큰 소리에 깬 작은 아들도 영문을 모른 채 울상이 되고 만다.
신시내티 주류 연극극장에서 지난 한 달 동안 공연된 연극 ‘듀랭고 (Durango)’의 한 장면이다. 마지막 회였던 지난 토요일 아시안 청년 모임이 그룹 티켓을 마련해 중년의 우리 한인 7명도 함께 관람했다.
소극장의 200석 좌석은 미국 노인들로 거의 찼다. 일년 공연을 예매하는 단골관객들 같았다. 이민 와서 아내를 잃고 혼자 살면서 대학생과 고등학생 아들 둘을 키우는 코리안 아빠의 아픔을 그들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빠져서 본다.
연극 속의 아빠는 며칠 전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어두운 마음을 떨칠 겸 누구나 다 가 봤다는 콜로라도의 듀랭고로 아들들과 여행길을 나섰다. 하지만 애리조나 사막을 달리는 동안 세 부자는 오랫동안 지녀 온 각자의 스트레스와 서로 간의 반감을 조금씩 드러내다가 결국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 소외감, 의무감의 스트레스를 드러내고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이다.
며칠 전 연극을 보며 중년의 한인남자가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더니, 나도 막이 내리고 불이 켜지면서야 아린 가슴이 좀 나아졌다. 옆에 앉은 중년의 한인은 마침 그 자신 해고를 당한 처지라 굳은 얼굴에 쓴웃음만 지었고, 또 한 사람은 연극 내내 감정 추스리기가 힘들었다 한다.
‘듀랭고’는 한인 줄리아 최가 쓴 희곡으로 2년 전 코네티컷에서 한달간 공연된 후 곧 다시 뉴욕 퍼블릭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2006년도 10대 작품으로 선정했고 LA 타임스도 2007년 우수작으로 선정한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이외에도 ‘99 역사(Histories)’ ‘분실의 구조(The architecture of loss)’ 그리고 코미디 ‘BFE’ 등이 있다. 그는 FOX TV쇼 ‘Fringe’ 와 ‘Canterbury’s law’ 의 작가이기도 하다.
줄리아 최는 앰허스트 칼리지를 졸업하고 UC 버클리, NYU, 줄리아드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004년 아놀드 웨이스버거 상, 2005년 베리스타비스 상과 클레어 토우, 스잔 스미스 블랙번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뉴욕 파운데이션 예술기금에서 기금을 받았고, 마이 극장, 뉴욕 극장 워크샵 등에서 커미션을 받기도 했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과의 대화가 있었다. 큰 아들 역의 피터 김은 실제 한인 2세로 NYU를 졸업하고 예일 드라마 학교 등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경력이 화려한 배우다. 그는 어떤 장면은 자신이 자랄 때의 상황과 너무 똑 같아 연기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정화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 역과 작은 아들 역의 동남아 배우들도 문화가 비슷한 동양 이민가정에서 자라 마치 자기 삶을 다시 연기해내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인 역을 맡은 2명의 배우도 생긴 것만 다를 뿐이지 극중 인물들의 고민 대부분을 자신들도 겪었다면서 자신들이 한인역을 맡는다 해도 충분히 그 상황을 이해하면서 연기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결국 이 연극은 민족을 초월한 모두의 삶을 짚어보는 얘기라는데 모두 동의했다. 그래서 노년의 미국 관객들도 그렇게 아파하는 얼굴로 볼 수 있었나보다.
그러나 대사에서 한국이름과 한국말을 계속 듣던 내겐 아무래도 한인의 얘기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동양인 관객이 거의 없었다는데, 이곳 신시내티 400여 한인가정들이 자신들의 얘기로 만들어진 연극을 놓쳤고 그 배우들의 노고가 여기서 그치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
영어연극이라 한인사회에 들어가기가 힘들지 않겠느냐고 누군가 지적했지만, 캘리포니아와 뉴욕에는 각각 수십만의 한인들이 살고 있으니 그 정도 영어를 이해할 한인들은 작은 도시 하나만들 만큼은 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한인 중에 연극 인구가 많지 않아서인 것 같다.
작가와 배우가 한인이기 때문에 한인들이 각별히 신경 써준다는 게 좁은 생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수민족이라면 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지 않을까?
김보경 <수필가·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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