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사는 도시에서 ‘지구마을 축제’(Global Village Festival)가 열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비올 확률이 50퍼센트나 되었다. 전날 모처럼 준비한 책과 한복 전시장이 비에 젖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다행히 이튿날 아침은 싱그러웠다.
복잡한 주차장을 피해 시에서 준비한 셔틀버스가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이른 아침 페르시안 아줌마들은 그들 특유의 화려한 커튼을 늘어뜨렸고, 바로 건너편 중국 전시장에는 마치 도사를 연상케 하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화선지와 굵은 붓털을 고르고 있었다.
유리 상자 속의 전통 인형들로 가득 채운 일본 부스 옆에는 ‘개척시대의 미국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보넷을 쓰고 긴 치마를 입은 미국 할머니들이 분주했다. 한국 그림책 전시장 바로 옆에는 호피족 출신이라는 아메리칸 인디언 청년이 갖가지 전통 악기들을 주렁주렁 내걸었다. 실로 50여개국의 다양한 민족들이 참여하는 지구촌 축제였다.
첫 손님은 한국 며느리를 두었다는 미국인 노부부였다. “요즘 우리 며느리가 손자 녀석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는데 어떤 그림책이 좋을까요?” 나는 한국적인 전통을 담고 있는 ‘솔이의 추석이야기’나 ‘설빔’ 그리고 ‘견우와 직녀’를 소개했다. 영어로도 나와 있을 뿐 아니라, 삽화도 아름다운 그림책이었다.
또, 잠깐 들르신 어떤 할아버지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분이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그분께 ‘할머니’라는 그림책을 보여드리자, “우리 할머니 죽었어” 하신다. 할아버지 가슴엔 어떤 모습의 할머니가 살아 계실까 궁금했다.
잠시 후엔 젊은 엄마와 초등학생 남자 아이가 들어왔다. 아이는 한국에서 읽은 적이 있다며 영어로 번역된 ‘The Bad Kid Stickers’(나쁜 어린이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영어 그림책 ‘The Name Jar’를 보더니 “엄마, 이거 우리 학교에서 배운 책이야” 하며 반가워했다.
‘내 이름을 담은 병’이라고 ‘번역된 이 책은 아이가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 갓 온 ‘은혜’라는 아이는 자기도 남들처럼 발음하기 쉬운 미국식 이름을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주신 도장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 속에 ‘베풂’이라는 좋은 뜻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 이름을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열 한시였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가 전시장 앞에서 흥겹게 놀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이 하나 둘씩 몰려왔다. 때맞춰 사물놀이의 유래를 담은 그림책을 선보였다. 이윽고 가야금 공연까지 우리 차례가 끝나자 중국학교에서 나온 사자춤 공연이 뒤를 이었다. 분홍빛 사자는 큰 눈꺼풀을 껌벅이며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휘저어 다녔다.
또 저편 무대에서는 잔잔한 명상 음악과 함께 태극권 시범이 펼쳐졌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상투처럼 쪽진 중국 사범과 함께 백인 여성, 흑인 할아버지가 아주 유려한 몸동작으로 태극권 시범을 보였다. 그것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왠지 낯익은 남자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서 우리 부스로 들어온다. 영락없는 한국 아이다. 뒤따라온 백인 엄마를 보니 지난 번 다문화 축제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난 그 때 한국에서 입양한 자신의 아이에게 줄 작은 태극기가 있느냐고 묻던 엄마가 기억나 얼른 태극기를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축제가 있을 때마다 아이를 데리고 와 그가 태어난 곳의 문화를 느끼게 하려고 애쓰는 엄마, 든든한 아빠의 무등을 타고 즐거워하는 아이의 뒷모습에 가을 햇살이 눈부셨다. 난 새삼 우리가 사는 이곳이 축복이라고 느꼈다.
다름과 차이를 넘어 모두가 저마다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인정해 주는 것, 이제 단일민족을 자랑하던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달에는 ‘다문화 가정 지원법’이 시행되었고, 한국 최초로 다문화 어린이 도서관 ‘모두’가 개관되었다.
이곳에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부모들을 대상으로 여러 언어 보육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11개국의 다양한 어린이 책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들 가슴 속에는 어머니의 입말인 모국어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간절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미경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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