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이 넘은 미국식 고택과 한국식 정원의 아름다운 만남이 집주인인 최병관·영숙씨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멋스럽게 보여준다(왼쪽).
영화 ‘트랜스포머’를 비롯해 TV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히스토릭 웨스트 애덤스의 고택.
옛 모습에 우린 반했다
역사와 전통의 멋을 아는 사람들 최병관·영숙 부부
유명 건축가가 장인 정신으로 지은 판사가 살던 ‘웨스트 애덤스’고택
3년전 구입 옛 모습 최대한 되살리면서 현대식 장비와 조화시켜 복원
한인타운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적 명소… 미국인들도 종종 구경 와
최씨 집 드라이브 웨이는 영화배우 샘 위크윅이 살던 집… 이 지역 영화 촬영지로 각광
백년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고택 주인 이야기다.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 백년이 넘은 고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잘 지어진 옛 집을 ‘히스토릭’(Historic)이란 단어를 붙여가며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옛 것만 고수하는 게 능사는 아닌 시대지만, 옛 것을 모르고 산다는 건 아무래도 삶의 깊이가 없어 보인다. 흙과 돌, 나무의 삼위일체가 만들어낸 고택의 진정한 멋은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이다. LA 한인타운 인근 ‘히스토릭 웨스트 애덤스’(Historic West Adams)의 한 고택을 복원해 옛 것의 아름다움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최병관·영숙씨 부부를 소개한다.
고즈넉한 가을 정취를 품고 사는 이들 부부의 고택에 들어서니 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빛깔이 묵직하고 깊은 고재로 지어진 집만큼이나 클래식한 삶의 향기로 가득한 공간이다. 잘 지어진 한옥 같은 운치가 감돈다. 아마도 이 고택은 지금의 집주인을 만나서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 ‘크래프츠 하우스 투어’에 앞서 서재에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개조한 앤틱 양식의 책상 앞에서 이 집의 역사가 담긴 사진첩을 들추며 집주인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다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책상.
“이벨 극장과 사우스웨스트 뮤지엄 등을 지은 유명 건축가 섬너 P. 헌트가 건축한 집입니다. 첫 번째 주인은 에이브러햄 링컨,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 시절 지방법원 판사와 순회법원 판사를 지낸 분이죠. 인종차별에 대항한 존경 받는 판사가 살았던 집에 산다는 것이 흐뭇합니다.”
이쯤 되면, 이들 부부가 장만한 고택의 역사에 대한 조예가 존경스러워지지 않는가. 원래는 ‘장인정신으로 멋지게 지어진 옛날 집’(Arts & Crafts House)이었지만 3년 전 이들 부부가 이사를 올 때는 그냥 오래된 집에 불과했다고 한다.
채광과 통풍을 고려해 터와 방향을 잡고 나무와 돌, 흙으로 지어진 크래프츠맨 하우스였는데 두 번째 집주인은 이 고택 보존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다고.
타운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적 명소 ‘웨스트 애덤스’가 지닌 멋스러움에 반해 이 집을 구입한 이들 부부는 2년 동안 리모델링을 했다. 살기 편리한 새 집으로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고택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되살리면서 현대식 장비를 감추어 들여놓는 보수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최씨가 기와와 대나무 등으로 정성스레 만든 한국 정원이 고택의 잔잔한 풍경과 어우러져 멋들어진 운치를 전하고 있다. 잉어들이 뛰노는 물망초 연못은 가을날 한가로운 오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때 마침 1930년대부터 이 동네에서 살아 터줏대감으로 통하는 월터를 비롯해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웨스트 애덤스의 역사를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잉어들이 뛰노는 물망초 연못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주인과 이웃 사람들이 가을날의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고 있다.
“웨스트 애덤스(‘Historic West Adams’로 지칭된 지역)는 1880년부터 1925년까지 각기 다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고택들이 몰려 있는 지역입니다.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갖는 미국인들이 종종 구경하러 오는 지역입니다. 1950년대 10번 프리웨이 건설로 인해 구획이 생기고, LA폭동을 겪으면서 일부 고택들이 파손되었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지역입니다”
대부분이 아메리칸 크래프츠맨 하우스이지만, 18세기 초기의 건축인 앤 여왕시대 양식이나 고딕 리바이벌 양식으로 지어진 집도 있다. 단 한 채도 같지 않다. 특히 옆집과 최씨 집의 드라이브 웨이는 영화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샘 위크윅이 살던 집으로 영화에 출연했고, 이 지역은 ‘CSI’와 ‘몽크’ 등 TV와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사람의 손으로 빚은 고택이 지닌 독특함 때문이리라.
1899년 그라모폰사가 채택한 축음기 상표 ‘His Master’s Voice’(주인님의 목소리)에 등장한 니퍼처럼 축음기의 음악을 들으며 주인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빅터의 개.
옛 것의 아름다움, 옛 집의 소중함에 무뎌져 가는 요즘, 이들 부부의 넉넉한 고택은 참으로 그윽한 빛이 난다. 고풍스러움에서 발산하는 기품 있고 은은한 빛이다. 특히 집안 곳곳에 마치 처음부터 이 집의 일부였던 것처럼 놓여 있는 안주인 최영숙씨의 앤틱 컬렉션이 독특한 향기를 불어넣고 있다. 도자기를 굽듯이 하나하나 구운 타일로 장식된 벽난로와 벽화처럼 보이는 회화가 공간에 감각을 더하고, 그림 액자를 벽에 걸지 않고 선반이나 바닥에 두는 형태로 장식한 감각이 고택을 ‘역사의 멋을 담은 옛 집’으로 만들고 있다.
120년 된 샤드 프로이드(Chaud Froid) 세면대 싱크와 그에 어울리는 욕조
글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이들 부부의 고택을 구경하고 싶다면, 웨스트 애덤스 지역을 거닐어보자. 혹시 아는가. 클래식 피아노로 ‘고엽’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집주인을 만나 가을의 운치를 마음속에 담을 수 있을지도. 이웃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이들 부부의 고택 역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모든 이들에게 차 한 잔의 산책을 선물하고 싶어 한다.
<글 하은선 기자·사진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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