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표가 공화당으로 꽤 몰리겠지요?”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결정되자 주위에서 들리는 말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던 여성들, 민주당이 힐러리 대신 버락 오바마를 대선 후보로 뽑은데 대해 앙심을 품은 여성들이 이참에 공화당 쪽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진단이다.
골수 힐러리 지지자들 중에는 “오바마에게 표를 주느니 차라리 존 매케인에게 투표하겠다”며 분노를 표출한 여성들이 있었으니 그런 추측이 나돌 만도 한다. 정말 그럴까?
거칠게 구분하자면 이런 추측·진단을 내놓는 그룹은 대개 남성들이고, 그런 기대로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정한 매케인도 남성이다. 여성의 정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한인이민 연륜이 보다 깊어진 어느 날 한인이 주지사 같은 고위직에 출마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이민규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소수계 권익옹호에 극력 반대한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될까.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 성향이야 어떠하든 한사람이라도 더 한인이 고위직에 진출하도록 밀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당선이 결과적으로 한인 등 이민자 권익을 깎아내리는 세력만 키우게 된다면 동족이라고 무작정 지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성 유권자들이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와 비슷하다.
이번 공화당 전당대회의 스타는 단연 페일린이었다. 매케인이 러닝메이트로 그를 소개했던 한주전만해도 유권자들은 멍한 기분이었다. 경험 없고 이름 없는 그가 부통령 감으로 탐탁지 않기는 공화당 내에서 더했다.
그러나 9일 전당대회 연설 이후 페일린은 한 순간에 공화당 수퍼스타가 되었다. ‘핏불’ 같은 전의를 불태우며 민주당을 공격하고 오바마를 조롱하는 그를 보며 공화당 보수진영은 대단히 만족하는 분위기이다.
객관적으로 페일린은 배울 점이 많은 여성이다. 아이들 학교에서 자원봉사 하다가 지역사회 이슈에 눈뜨면서 시의원에 출마하고, 시의원 거쳐 시장, 이어 주지사까지 되면서 자신의 소신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왔다. 4남매의 엄마로 주지사 일하기도 힘든데 다섯 번째 아기를 임신하자 업무에 차질이 생길까봐 가족·측근들에게까지 한동안 임신사실을 숨기고, 태아가 다운 증후군인줄 알면서도 낳아 기르는 등 보통 강인한 여성이 아니다.
그러나 지역정치에 성공한 여성 개인으로서 그를 존경하는 것과 국가를 이끌 여성 부통령으로 그를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성 유권자들에게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정치 성향 이다. 여권운동 진영이 수십년 투쟁하며 얻어낸 가치들을 페일린은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낙태 이슈. 낙태 하고 안하고는 여성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라고 보는 여성의 낙태권리에 대해 페일린은 강경한 반대 입장이다. 총기규제, 환경보존, 창조론 등 사사건건 진보적 여성계와 그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다. “힐러리 지지자들이 페일린 쪽으로 …”하는 추측에 대해 당사자들이 “모욕적이다”며 분개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힐러리와 페일린은 여성으로서 같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여성 차별적 사회에서 힐러리는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수십년 남편 뒤에 있어야 했다면 페일린은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신데렐라가 된 케이스이다. 페일린이 여성이 아니고 낙태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매케인의 러닝메이트가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국 전환용’‘위기 돌파용’으로 ‘여성카드’가 쓰인 예는 한국에서도 종종 있었다.
미국에서 여성 부통령 후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4년이었다.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이 제랄딘 페라로 당시 연방하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정했었다. 하지만 페라로 남편의 사업과 관련한 금융비리 의혹, 탈세 의혹이 불거져 나오면서 선거에 나가지 않음만 못하게 되었다. ‘여성 카드’로 표심을 잡아보려는 욕심에 러닝메이트에 대한 검증을 철저하게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도록 민주당에서 여성 부통령 후보가 나오지 못한 것은 그 여파와 상관이 있다.
매케인 역시 급하게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정했다. 페일린이 페라로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파장이 자질 있는 여성들의 발목을 또 한동안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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