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여름내 한가하던 캠퍼스에 다시 생기가 돈다. 오리엔테이션 등 새 학기 여러 행사장을 생기발랄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 신입생들과 그들의 옷매무새는 마치 나의 지나온 세월들을 상기시키듯 해가 갈수록 앳되어지고, 그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 족들의 모습도 갈수록 각양각색이다.
“얘, 우리도 저땐 나름 상큼 발랄했을 거야…”
10년만에 만난 한 친구랑 캠퍼스를 거닐다가 친구가 먼저 옛날 얘기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바라보는 나의 아련한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
“그랬을까?”
이렇게 시작한 ‘과거 찾기’ 수다가 안 그래도 나이 들면서 조절이 불가능해진 잠까지 잊게 만들었다. 그것도 다음날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서 말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의 공백이 전혀 어색치 않은 건 물론, 몸의 여러 가지 증세까지도 비슷해 지나온 세월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또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예전엔 하루 이틀 꼬박 새우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둘 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눈을 비벼 잠을 쫓아내가며 마치 새로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처럼 촌음을 아껴 옛날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처럼 정도가 지나치다 싶게 나의 옛날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 단지 이날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올 여름이 내게 안겨준 특별한 선물인 옛 친구들 덕분에 나는 ‘옛 모습 찾기’에 맛이 들렸고, 친구랑 추억을 찾아나서는 일이 시작되기만 하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다른 일상을 모조리 무시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리고 친구들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지나간 모습들을 요리저리 뒤져 찾아내는 일이 비단 나에게만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닌 듯 느껴졌다. 스스로 끝을 내지 못하고 비행기 표처럼 꼼짝할 수 없는 스케줄이 있어야만 끝이 나곤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이번 여름 횡재처럼 한꺼번에 만나게 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대학원시절 친구들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엮다보니 나 자신의 변천사가 한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난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생각하다 문득 내가 이토록 그들과의 추억에 연연했던 이유가 단지 친구와 함께 울고 웃어가며 과거를 되짚고 있는 그 순간들이 좋아서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그 희로애락의 추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만남의 발자취들이고 또 다른 만남들이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늘어난 서로의 배 둘레 살을 단번에 알아보고 낄낄대며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는 옛 친구들, 나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이들과의 만남이 아스라한 먼 옛날로부터 나를 새로이 짚어가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을 아주 쉽게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이 기억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남길 기억에 대한 기대 또한 자연스럽게 생겨나도록 했다. 나의 옛이야기가 단지 이야기를 넘어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보려는 것 같았다.
내가 직업으로 하고 있는 일들 중 중요한 부분이 남들의 역사를 모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역사와 그 의미에는 한껏 열중했으면서도 정작 내 역사와 주변에 함께 하는 역사에는 무심했었구나 싶다. 그냥 오늘을 열심히 산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과거를 잔뜩 긁어다 모은 ‘고물상’이 아니라 단순 깔끔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목전의 급한 불만 끄며 살다보니 그 잔해로 남겨진 과거들을 문득 문득 기억할 뿐 그 일들이 내 인생과 내 주위에 남긴 의미를 고민해보는 일들은 상당부분 접고 살아온 것 같았다.
“근데 인제 너 뱃속까지 밝아진 것 같다?”
얘기가 무르익어 갈 때 친구가 툭 뱉은 말이다. 옛날처럼 힘든 일 잊고 싶어 밝은 척 하는 게 아니라 밝은 게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죽더라도 기쁘게 죽자’라는 모토를 조금은 이루었나보다 싶어 순간 참 행복했다.
앞으로 내 삶의 목표를 얘기하란다면 어차피 쉽지 않을 남은 길 그래도 기쁨을 잃지 않고 캠퍼스의 발랄한 신입생들처럼 주위에 생기를 나눠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오래 잊고 산 내 묵은 기억들을 찾아내어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그들과 함께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준 “친구야! 반가웠다. 그리고 고맙다!”
김선윤
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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