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애나의 퍼듀 대학 심리학과에서 얼마 전 골퍼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골퍼 46명에게 한 라운드를 돌게 한 뒤 골프 홀의 크기를 알아맞히게 하는 실험이었다.
골퍼들은 지름 9cm~13cm 까지의 검정색 원 9개가 그려진 포스터에서 퍼팅 때 본 홀과 같은 크기라고 생각되는 원을 하나씩 골랐다. 홀의 실제 지름은 10.8cm. 실험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날 점수가 잘 나온 사람일수록 큰 원을 선택했다.
골퍼들은 흔히 점수가 좋은 날은 “홀이 농구공 만해 보였다”고 하고 점수가 안 나오는 날은 “홀이 동전만하더라”고 하는 데 그런 말들이 일리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었다. 홀이 맨홀 만해 보인다면 공이 얼마나 잘 들어가겠는가.
그런가 하면 왕년의 테니스 스타 지미 코너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기를 하다보면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테이프를 슬로모션으로 틀어놓은 듯 공이 천천히 날아와서 어느 지점에 어떻게 떨어질 지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럴 때면 정확한 위치에서 정확하게 공을 받아 게임을 마음대로 몰아갈 수가 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집중 혹은 몰입으로 설명이 된다. 골프 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수용체가 많이 분포된 시야의 중심부에 홀의 상이 놓여 홀을 더 똑똑히 보게 되는 결과라고 퍼듀 연구진은 설명했다.
코너스의 ‘느린 공’은 정신집중만으로는 어렵다. 몰입의 경지이다. 어떤 활동이나 대상과 완벽하게 혼연일체를 이루는, 내가 공이 되고 공이 내가 되는, 무아지경의 신비로운 체험이다.
지난 2주 동안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베이징 올림픽이 막을 내린다. 올림픽은 인간의 몸으로 연출할 수 있는 온갖 경이로운 동작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체조, 다이빙, 수영, 달리기, 역도, 양궁 … 각 나라, 각 분야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노라면 인간의 몸 안에 얼마나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 지 감탄을 하게 된다.
특히 육상 100미터, 200미터 부문에서 연달아 세계신기록을 세운 우세인 볼트의 달리기는 경이 그 자체였다. 저마다 내로라하는 다른 선수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데 그 옆에서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놀이하듯, 장난하듯 가뿐하게 1등으로 결승점에 도달했다.
볼트가 다른 선수들과 가장 다른 점은 즐김이다. 그는 도무지 긴장하는 법이 없이 달리는 동작 자체를 즐긴다. 그의 달리는 동작에는 즐기는 자의 당당함이 배어있다.
공자는 인생에 지(知), 호(好), 락(樂)의 3단계가 있다고 했다. 뭔가를 배워서 아는 단계, 알다보니 차츰 좋아하게 되는 단계, 좋아하다 보면 마침내 즐기게 되는 단계이다. 알아야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해야 즐길 수도 있다. 그래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공자는 말했다.
몰입은 즐기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화가인 한 친구는 언젠가 이런 경험을 이야기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스튜디오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싶어 시계를 보니 그 사이 10시간이 흘러갔더라는 것이다. 10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내내 서서 작업을 했는데 배가 고픈 느낌도, 다리가 아픈 느낌도 없더라고 했다. 작업에 깊이 빠져서 시간도 일상사도 모두 잊어버리고 어떤 초월적 시공간에 도달한 듯, 완벽한 평안함과 희열감에 사로잡힌 경험이었다.
그래서 몰입은 그 깊음에 초점을 맞춰 ‘Deep Play’로(다이앤 애커만) 표현되기도 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맡기며 얻는 황홀감에 초점을 맞춰 ‘Flow’로(미하이 칙센트미하이)로 표현되기도 한다. 경험자들은 몰입의 순간 가장 이상적이고 완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체험한다고 말한다. 예술가들의 위대한 작품, 운동선수들의 탁월한 경기는 종종 몰입의 산물이다.
깊이 심취해 달리고, 뛰어 내리고, 던지는 올림픽 선수들을 보면서 우리 보통사람들도 몰입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까지 쫓기듯 허둥대며 살 것인가. 잡다한 수평적 경험들에서 벗어나 어떤 수직의 경험을 계발해야 하겠다.
가장 즐길 수 있는 일, 그래서 열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삶은 그만큼 풍요로워 질 것이다. 세상사를 모두 잊고 깊은 평안과 기쁨에 도달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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