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조선인이라면 차별받던 시대였던 만큼 당시 재일동포 사회에는 일본인 행세를 하는 조선인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여성들 중에도 기모노를 맵시 있게 빼입고 일본인인척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병원에만 가면 ‘정체’가 탄로 나곤 했다고 한다. 주사를 맞는 순간 일본말 대신 “아야!”하고 한국말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통증이라는 충격이 꼭꼭 무장한 의식의 껍질들을 한순간에 벗겨냄으로써 내면의 말간 알맹이가 무방비로 드러나 버린 것이다. 어린소녀였던 어머니의 눈에는 병원에서의 그런 해프닝이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 같았다.
체면, 처세, 때로는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우리는 많은 의식의 껍질들을 껴입고 산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의식이 빗장을 걸 수 없는 무의식의 차원으로 던져질 때 우리의 가장 본래적 모습이 드러나곤 한다. 정체성이다. 그래서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정체성에 충실할수록 편안하고 건강하다.
지루하던 일상 - 8월은 올림픽이 있으니 재미있겠다고 모두들 기대가 크다. 누가 금메달을 따든 하등 상관없는 우리가 올림픽에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으로서, 인간으로서 그 본질에 닿는 경험, 정체성과 상관이 있을 것 같다.
중국인들이 100년 동안 구상하고, 7년 동안 준비했다는 2008년 8월8일의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13억의 중화민족이 60억 세계인들을 손님으로 여봐란 듯이 펼친 축제, 베이징 올림픽은 그 자체로 이미 여러 기록을 세웠다.
400억 달러의 대회 총예산과 150만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 테러 방지를 위한 10만명의 치안요원과 100만대의 감시카메라 등이 역대 올림픽 최대 규모이고, 개막식에 참석한 100여명의 국가 정상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기록을 세우는데 일조했다.
반면 올림픽 반대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성화 봉송 과정에서 성화가 몇 차례씩 꺼지고, 티베트 유혈사태, 신장위구르자치구 테러 사건 등 올림픽 준비 과정 내내 불안했던 ‘긴장 지수’역시 아마도 기록적일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림픽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개막되고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이 모두는 잊혀진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 선수들의 경기와 ‘우리나라’의 메달 수에 집중한다. 그리고 ‘우리’라고 할 때 생각할 틈도 없이 떠오르는 것이 바로 민족적 정체성이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주는 소속감이야말로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의 기본 조건이다.
매번 올림픽 때마다 한인가정에서는 소소한 마찰들이 있다. 부모는 한국을 응원하고 자녀들은 미국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와-’하고 함성이 터져 나오고, 손뼉을 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안타까워하는 대상이, 미국에 얼마나 오래 살았든 1세들에게는 한국 선수이고, 한국음식 먹고 한국인 얼굴로 자라도 2세들에게는 미국 선수이다
그런가 하면 누구를 응원하든 상관없이 올림픽 같은 축제가 열리면 우선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은 본래 놀고 즐기도록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종족으로서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은 ‘생각’이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인 탓에 동물과 구분되고, 뭔가를 만들고 제작하는 ‘호모 파베르(제작하는 인간)’의 특성 덕분에 문명을 이뤄냈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인간 본래의 특성으로 놀이하는 본능이 꼽힌다. 네델란드의 사학자 요한 호이징하의 주장이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을 보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도 논다. 이런 우리의 본질 때문에 일상이나 생산성과는 상관없는 놀이·축제가 오히려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한국 축구가 이번에는 4강 진출을 할 수 있을까. 박태환은 한국 수영사상 첫 금메달을 따낼 수 있을까. 영화 ‘우생순’으로 친근해진 한국 여자핸드볼 선수들은 어떤 성적을 낼까. 마이클 펠프스는 8관왕이 될까. 줄줄이 이어지는 볼거리들에 부자가 된 느낌이다. 8월에는 일만 하던 ‘호모 라보란스(일하는 인간)’ 보다 ‘호모 루덴스’로 충실해봐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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