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진 참사현장을 몇 며칠 씩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것이 불과 2달여 전인데 며칠 전 지진을 겪고 나니 지진이 새롭다. TV로 지켜보던 ‘남의 지진’과 내 몸을 관통한 ‘나의 지진’의 차이이다. ‘남의 지진’이 안타까움이라면 ‘나의 지진’은 섬뜩한 공포감이다.
남가주 주민들은 지난 29일 강도 5.4의 지진으로 한바탕씩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동안 땅이 잠잠한 덕분에 잊고 있던 사실, “캘리포니아는 지진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던 오전 11시42분 -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지진을 맞았다. 일하다가 의자가 덜컹덜컹 흔들리자 우르르 대피한 사람들, 샤워하던 중 물줄기가 갈지자로 흔들리는 데 옷을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헷갈리던 사람, 점심상을 차리다가 국그릇을 뒤엎은 주부, 화장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황당했던 사람… 그런가 하면 병원과 양로원에서는 환자와 노인들이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기도 했다.
‘흔들림’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듯 이어가던 일상이 지진의 충격으로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 이번 지진이 앞으로 30년 내에 닥친다는 그 강진이었다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때 그 상태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목욕탕에서, 부엌에서 …
다행히 땅은 다시 잠잠하고, 지진의 공포는 잊혀지고, 우리의 일상은 굳건한 대지 위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대지는 굳건한 게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가 느끼지를 못할 뿐 약한 지진은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난 한주동안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서 발생한 미진은 430여회였다고 한다.
지진을 지구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으로 본다면 우리 몸에는 암이라는 이상 현상이 있다. 오랜 세월 걸려서 형성된다는 점, 계속 진행되면서도 낌새도 못 채게 감쪽같다는 점, 어느 순간 갑작스런 충격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 일단 발생하면 우리를 공포로 몰고 간다는 점, 그리고 종종 종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지진과 암은, 조금 억지스럽게 연결하면,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예고된 강진처럼 우리 생애의 마지막에 암이 들이닥칠 확률 또한 높다. 오래 살수록 암에 걸릴 확률은 높아지고 평균 수명은 자꾸 길어지니 암 환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암전문의에 의하면 암의 2/3 이상은 60세 이후에 발생하고, 노인들 서너 명 중 한명은 암으로 죽는다. 노년기는 암이라는 ‘지진대’를 안고 사는 시기인 셈이다.
지진으로 소동을 겪은 다음 날 아침, 지인으로부터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잔잔하고 따뜻한 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이해인(63) 수녀가 암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 ‘서편제’‘축제’‘이어도’ 등으로 한국 문단의 큰 기둥이었던 소설가 이청준(68)씨가 폐암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경리라는 거목을 역시 폐암으로 잃은 지 3개월이 채 못 되었다.
이분들이 60대, 70대에 암 진단을 받았다면 그 시작은 적어도 40-50대였다. 정상적 세포가 암세포로 진화하는 데 보통 20-30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인도 모르게 지금 몸 안에서 세포가 암세포로 진행돼가는 사람들이 우리중에는 많이 있을 것이다. 종말의 시작이다.
8년 전 한 샐러리맨이 쓴 ‘3박4일, 그 길었던 이별연습’이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보험회사 이사였던 당시 42세의 김모씨가 임파선 종양 진단을 받고 정신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담이다. 마냥 살 것 같이 귀한 줄 모르고 살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것 같게 되자 후회가 밀려들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확연해 지더라는 것이다.
“생의 끝까지 가는 동안 무수한 화살이 날아오고 내가 그 화살을 오늘 맞을 지 내일 맞을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마음의 준비 없이 살다가 막판에 몰려서야 갈팡질팡이다”고 그는 자책했다.
종양이 물혹으로 판정돼 3박4일간의 ‘죽음여행’이 끝난 후 그는 새로운 삶을 결심했다. 언제 어느 때 종말을 맞든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위해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사랑할 시간과 능력이 있을 때 충분히 사랑하며 살자는 것이 요지이다.
종말에 대한 예감은 삶에 대한 지혜를 준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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