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이니 시한부 환자니 하면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난리 법석이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지 않았냐?”
아버지의 언행으로 보아 아버지는 충격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꿈이 있는 곳에 꿈이 이루어집니다. 부친께서 관행을 깨듯 옥희 씨도 고정관념을 깼네요. 고정관념을 깨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요.”
노 을
구릉 위에서 내려다본 골짜기는 들짐승의 보금자리처럼 아늑해 보였다. 모진 비바람도 비켜갈 것 같았다. 맞은편 서쪽 구릉 위에 일몰을 앞둔 태양이 낮게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묘소는 서쪽 구릉이 시작되는 골짜기 가까이에 있다.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이 보면 집안 망칠 자리라고 혀를 찰 게 분명하다. ‘골짜기면 어떻고, 앞이 콱 막히면 어때. 내가 쓸 땅인데……’하시며 아버지가 우겨 사신 자리였다. 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망 좋은 묏자리의 반값에 샀다고 흡족해 하시며 암환자답지 않게 휘적휘적 언덕을 오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아버지 가신지 어느덧 달포. 묘비가 안치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나흘 전이었다. 아버지가 비문을 짓고 한글 글자체와 그 크기까지 골라 묘비 디자인을 하셨으므로 내가 할 일은 주문대로 제작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검은 화강암 비석에 음각으로 선명하게 새겨진 궁서체의 세로 비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로로 쓰인 비문은 공원묘지 안에 아버지의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세로로 써야 붓글씨의 멋이 살아.’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들고 간 교포신문 H 일보를 묘비 위에 활짝 펼쳐 놓았다. 신문 한 면을 온통 차지한 아버지의 장례식 기사 가운데 일몰을 배경으로 바닷가에서 찍은 나의 사진도 실려 있다.
내가 H 일보 송민호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이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소프라노 유옥희씨가 이름 없는 한 교포의 장례식에서 조가를 불렀다는 사실이 빠른 입소문을 타고 화젯거리가 된데다, 관행에서 벗어난 이색 장례식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탓도 있었다.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인터뷰를 거절하려던 나를 송 기자가 몰아붙였다.
“이런 기회에 장례식을 치밀하게 준비하신 부친의 메시지를 잘 정리해서 교포사회에 알리는 것이 김필선 목사님이 아들로써 마지막 효도하는 길이 아닐까요?”
이틀 뒤 오후 내가 부목사로 일하는 얼바인 소재 미국 교회 사무실로 그가 찾아 왔다.
“정말 몰랐는데요! 이렇게 젊은 이세 목사님이신 줄은……한국말을 하도 잘하셔서……”
송 기자는 취재한 내용이 오는 토요일 특집 판에 게재될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준비했던 각종 자료들을 송 기자에게 전했다. 자료 가운데에는 장례식 순서지, 묏자리 및 관 구입 계약서 사본, 묘비 디자인, 장례식 녹음테이프와 사진 따위가 들어 있었다. 인근 식당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송 기자를 차에 태웠다.
“운치 있는 인터뷰 장소로 모시려고요. 잘 하면 일몰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옥희의 CD 음반을 틀었다. ‘노래의 날개 위에’가 천사도 시샘한다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 나왔다.
“아버님이 지난 10년 동안 즐겨 들으시던 CD 에요. 특히 이 노래하고 ‘사랑의 기쁨’ 두곡을 무척 좋아 하셨지요. 장례식 때도 들려달라고 부탁하실 정도였어요. 옥희씨의 열렬한 팬이셨죠.”
“장례식장에서 고전음악이 흘러나온다……” 송 기자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도심을 빠져나와 라구나 비치로 가는 133번으로 들어섰다. 야산 계곡 사이로 뚫린 좁은 도로를 벗어나자 태평양 바다가 눈앞에 활짝 펼쳐졌다. 해안선을 따라 꼬불꼬불 달리는 1번 도로를 만나 북상을 하다 왼쪽 언덕 위로 꺾어 들었다. 노을을 벗 삼아 해변 산책도 즐길 수 있는 인적이 뜸한 곳이다. 태양이 결승선을 막 디딘 마라톤 선수처럼 수평선에 맞닿아 있었다.
“아버님과 즐겨 찾든 장소지요. 아버님은 태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때는 하루의 대역사를 마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노을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라고 하셨어요. 인생이란 죽음이 노을처럼 아름다운 빛을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요?”
송 기자는 어느새 수평선 밑으로 반쯤 잠긴 태양을 배경삼아 나의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해질 무렵 2월의 해변은 싸늘하다. 앉을 자리를 찾는데 마침 돌 의자가 눈에 뜨였다. 한낮 태양으로 달구어진 돌 의자는 아버지의 품처럼 따스했다. 아버지의 환영들이 눈앞에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송 기자가 취재수첩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와 인생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 미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뒤였다. 나는 입대 전 계획대로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계획을 들은 아버지는 창의성이 요구되는 홍보나 광고업계로 나가면 내가 크게 빛을 볼 것이라고 부추기는 한편 내 생각을 돌려보기 위해 한국의 큰 삼촌을 동원하는 등 끈질긴 설득 작전을 펼쳤다. 내가 좀체 흔들리지 않자 아버지는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신학교 진학을 그토록 만류하던 아버지는 막상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적극적인 나의 후원자로 변신했다.
“너도 목사안수 받으면 결혼 주례나 장례식 집례를 할 수 있지 않겠냐?”
신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이렇게 허두를 뗀 아버지는 느닷없이 수수께끼 하나를 내셨다.
“나를 위한 행사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때가 평생에 딱 한번 있어. 뭔 줄 알겠냐?”
“결혼식 아니에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대답이네.”
“그럼 틀렸다는 말씀 아니에요? “
“내가 힌트를 잘못 줬나? 그거 장례식 아니냐! 장례식은 고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관행에 따라 치루잖아.”
나는 아버지의 수수께끼 같은 의도를 간파할 수가 없었다.
“관행을 깨어 보고 싶다는 말씀 아니세요?”
“관행이 진리는 아니잖아? 내 장례식을 내가 치러 보고 싶은데…… 죽음도 내 인생의 한 부분이야.”
아버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떼셨다.
“아버지! 지금 농담 하세요?”
칠순 나이에 오십대 못지않은 건강을 자랑하는 아버지가 장례식을 화제 삼는 것조차 내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다.
“아버님 건강하시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장례식 타령이세요?”
“건강하구 말구. 이 문제는 건강 하고는 상관이 없어. 평소 내 소신이니까. 내가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넌 집례만 하면 돼. 필선인 한국어로 설교도 잘 하잖아.”
“아니 상주인 아들이 제 아버지 장례식을 집례하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러면 아들이 집례하면 안 된다는 법은 또 어디 있냐?”
아버지는 쉽사리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잘 아시는 목사님들 많잖아요. 그런 집례는 전 죽어도 못해요!”
“말장난을 하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래도.”
“아버지! 그거 신문에 날 일이에요. 그렇게 매스컴을 타고 싶으세요? 타시려거든 생전에 타셔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는 아버지가 시쳇말로 너무 튀신다고 쏘아붙였다.
아버지의 의도는 나에겐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타성이나 관행에 늘 도전적인 아버지가 장례식을 다녀올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미국에 살면서 줄잡아 백번쯤은 장례식에 다녀왔을 걸. 그런데 조객 숫자, 조화 숫자와 고인의 경력이 조금씩 다를 뿐 장례식이 하나같이 다 비슷해.”
아버지는 계획이 벽두부터 나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적잖이 실망스런 표정이었다.
그 뒤 아버지의 일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퇴근 길 일주일에 서너 차례 헬스클럽에서 체력 단련하고, 도서관에 들려 ‘전 세계 걸작 광고 문안’ 출판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교포사회를 상대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을 아버지는 꽤 즐기는 것 같았다. 매주일 아침에는 15년째 계속하는 노숙자 봉사활동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틈틈이 거동이 불편한 주변의 환자나 노약자를 방문하여 마술을 보여주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마술사였다. 성인병이라고 부르는 고혈압, 당뇨 따위는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아버지의 건강에 뜻밖의 적신호가 켜진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였다. 연례 건강검진에서 암 중에서 가장 완치율이 낮고 치료가 어렵다는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조직검사 등 정밀 진단 결과 아버지의 췌장암은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였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한동안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며칠간 병원 신세를 졌다. 전문의의 조언에 따라 아버지는 항암치료를 포기했다.
“말기 암이니 시한부 환자니 하면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난리 법석이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지 않았냐?”
아버지의 언행으로 보아 아버지는 충격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죽음처럼 확실한 게 어디 있어. 그런데도 사람들은 좀체 죽을 준비를 안 해.”
아버지의 첫 준비 작업은 묘지 구입이었다. 아버지는 묘지 구입에 나서며 나를 동행시켰다. 그날 아버지는 무슨 신나는 쇼핑거리라도 생긴 듯 다소 들뜬 기분이었다. 쇼핑장소는 15년 전 할머니가 묻힌 파인 힐 공원묘지였다. 묘지중개인 홍 씨의 안내로 묘소를 둘러보았다.
“위치에 따라 두 배 이상 값 차이가 나요. 한국 분들은 묘지 선택에 풍수를 꽤 따져요.”
직업상 풍수지리학을 공부했다는 홍 씨가 풍수가 좋다는 묏자리 여럿을 선보였다.
“풍수를 미신으로 간단히 치부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우주에는 에너지 곧 기’가 흐르고 있거든요. 이 ‘기’가 가장 효율적, 이상적으로 흐르도록 생활공간을 친환경적으로 만드는 일이 현대 풍수학의 근간이거든요. 환경이 사고, 감각,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 아닙니까? 요즘 한국에서는 풍수 인테리어 등 생활 풍수가 유행하고 있어요. 풍수지리의 목표는 번영, 균형, 조화와 복지 네 가지입니다.”
“묏자리에 명당이라는 곳은 어떤 장소지요.”
홍 씨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한마디로 ‘기’가 제대로 형성된 곳이죠. ‘최고의 지관은 꿩’이라는 말이 있어요. 꿩이 명당을 귀신 같이 찾아내요. 꿩이 알을 낳고 부화시키려면 생기가 뭉쳐 따스한 기운이 올라오고 바람이 잠잠한 양지바른 곳이어야 하거든요. 산짐승이 새끼를 낳는 곳은 명당으로 봐도 좋지요. 이런 명당에 모시면 고인의 영혼과 유골이 평안을 누리게 된답니다.”
“글쎄요, 짐승들의 보금자리를 가로채서야 어디 유골인들 평안을 누릴 수 있겠소. 결국 인간들이 명당을 많이 차지할수록 짐승들의 보금자리는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겠소. 이거야 말로 환경 파괴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버지가 뜻밖에 반격을 가하자 홍 씨는 움찔하는 눈치였다.
“묏자리에 수맥이 흐르면 자손이 화를 입을 수도 있다고 말들 하지요.”
홍 씨는 ‘화’에 힘을 주어 말한 뒤 아버지를 흘끔 쳐다보았다.
“나 좋다고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게 화를 미치게 하고 싶지는 않소만…… 싼 곳도 몇 자리 보여 주시지요. 설마 인간의 영혼이 풍수에 놀아나기야 하겠소?”
“아버지! 화가 문제가 아니에요. 풍수가 좋아서 뭐 나쁠 건 없잖아요?”
내가 볼멘소리로 거세게 항의하자 아버지가 나를 향해 왼쪽 눈을 깜짝거렸다. 소신껏 할 터이니 제발 좀 양해해 달라는 아버지 특유의 몸짓 신호이다.
“누가 쓰실 건데 그렇게 싼 묘만 찾으세요? 쓰실 분이 한국 사람이 아닌가 보죠?”
홍 씨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묏자리를 구입한 뒤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650달러짜리 소나무 관까지 예약했다.
뒤늦게 묘지구입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펄쩍 뛰셨다.
“난 풍수지리의 ‘풍’자도 몰라. 아니 처자식이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있는데 그런 묘지 사서 집안 망신시킬 일 있어. 당장 해약해!”
소식을 전해들은 팔순의 큰 고모도 열을 내 어머니를 응원했다.
“죽으면 다야? 산 사람 생각도 좀 해줘야지. 얼마나 궁색하면 제 묻힐 자리 하나 변변한 곳에 장만하지 못하고 떠났겠냐고 좀 말들이 많겠어. 돈 절약할 데가 따로 있지, 절약해서 천당 갈 때 노자 하려나. 넌 그림자처럼 쫓아만 다녔냐?”
“그게 아니고요……”
고모는 아버지를 향해 역정을 내시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뭐가 아냐? 싸구려 소나무 관은 또 뭐야? 나 같으면 그 안에 들어 누워 뷰잉할 생각하면 창피스러워서라도 눈을 감지 못하겠네. 그게 어디 본인이 나서서 할 일이냐고?”
고모는 혀를 끌끌 내차다 한숨까지 푹 내쉬었다. 묘지와 관을 싸게 샀다고 들떠 있던 아버지는 입맛만 쩝쩝 다시다 슬그머니 방 안으로 사라지셨다.
아버지의 병세는 예상보다 빨리 악화되었다.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노숙자 봉사를 내가 대신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발병은 곧 노숙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써니를 언제쯤 여기서 다시 볼 수 있게 돼요?”
써니는 아버지의 영어 이름이다. 아버지가 토니, 피터 등 노숙자들과 아주 허물없는 교제를 나누었음을 알았다. 아버지 대신 약 2개월간 봉사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의 부음은 친지들에게 장례일정과 함께 전달되었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장례식순 프로그램은 날짜만 써넣고 복사만 하면 되었다. 식순에는 약력소개, 뷰잉 등 순서가 빠져있었다. 장례식 장소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내가 시무하는 교회 친교실로 정했다.
“뷰잉을 거부하실만한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송 기자가 모처럼 입을 열었다.
“어머님은 원하셨지만 아버님은 뷰잉에 대해 부정적이셨어요.”
나는 아버지가 문병 온 고교 동창 권 목사와 뷰잉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한 적이 있었다. 권 목사는 뷰잉을 원치 않는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것 같았다.
“왜 뷰잉을 의무처럼 해야 하지? 나는 지금껏 뷰잉이 없는 장례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뷰잉 여부는 전적으로 생전에 고인이 선택할 문제아냐? 고인의 의사를 무시한 뷰잉은 시신 전시나 다름없어.”
“그게 바로 모두가 뷰잉을 원한다는 증거 아냐? 고인의 죽음을 실감하고 또 고인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라고 순수하게 이해하면 어때? 나도 뷰잉이 없는 장례식은 한 번도 집례해 본 적이 없는걸.”
“하나 같이 뷰잉을 한다는 게 오히려 어느 누구도 감히 관행을 거스를 생각조차 못한다는 증거 아냐? 위암으로 2년간 투병하다 타계한 어머님의 죽음이 떠올라. 뷰잉 때 모습이 마치 고분에서 발굴해낸 미라 같았어. 어머님은 원치 않으셨는데 내가 뷰잉을 허락했었거든.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려. 조객들에게도 뷰잉은 의무가 아니야, 선택의 문제지. 값비싼 고급 관을 쓰는 이유가 어쩌면 뷰잉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어.” 아버지를 설득하려던 권 목사가 오히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약력소개 순서도 제외되었다. 약력은 순서지에 간략히 기재했다. 조객들이 기꺼이 알아야 할 가치나 이유가 없는 학력이나 경력이라면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이른바 일류 학교를 나왔더라도 그 학벌이 오로지 자신의 밥벌이와 자기과시의 수단에 불과했다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그런 학벌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껴안고 가는 한 학벌 제일주의가 낳은 학력위조 같은 한국적 병폐를 치유할 도리가 없다는 거였다.
오후 7시 장례식 준비를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준비라야 다과 준비와 확대한 아버지 사진들을 친교실 안에 전시해 놓고 입구에 조위금을 넣을 헌금함을 갖다 놓는 것이다.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사진들은 캐나다 여행 때 계곡을 힘차게 타고 오르는 연어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가족사진, 중국에서 탈북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홈리스 봉사 때 마술 공연하는 사진, 바닷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등 모두 일곱 장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조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유옥희 씨의 ‘노래의 날개 위에’가 장례식의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내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때 소매가 긴 까만 드레스를 입은 사십 초반의 두 여인이 막 식장 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두리번대다 곧 빈자리를 찾아갔다. 한국인 조객들 사이에 앉아 있는 몇 그룹의 외국인들이 눈에 뜨였다. 한 그룹 가운데에 토니와 피터의 모습이 보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첫 장례집례의 기회를 허락해주신 아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 장례식은 아버님께서 생전에 준비하셨습니다. 평상복 차림으로 오시도록 초청하신 분은 바로 아버님이십니다. 가장 극심한 슬픔을 표출하기 위해 죽음이나 영적 암흑을 상징하는 검정 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아버님은 검정 상복을 성토하셨어요.”
나는 간략하게 영어 통역도 곁들였다.
‘죽음을 아름답게 준비하자.’란 제목으로 짧은 설교를 했다.
“아버님은 인생은 죽음까지를 포함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인생이 아름답다는 말은 곧 죽음도 아름답다는 뜻이지요. 죽음은 결코 비극일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이 어찌 비극으로 막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님은 인생의 마침표를 스스로 찍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불어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지도자의 큰 덕목으로 꼽았습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유럽의 귀족처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가 존경과 합당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가진 것이 오로지 돈뿐인 현대판 귀족들이 많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가진 자들은 돈으로 명예를 사고 돈으로 의무도 해결하지요. 별로 가진 것 없는 아버지도 마치 ‘노블리스’처럼 ‘오블리제’를 안고 사셨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것 하나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고 하셨지요. 작은 나눔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요. 그래서 ‘오블리제’는 인간 모두의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기뻐하다 때론 관계를 끊고 혹은 잃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이어 추모의 시간이 이어졌다.
“저의 아버님에 관해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을 갖고 계시면……”
육척 거구의 토니가 걸어 나왔다. 토니는 삼십대 후반의 흑인이다.
“노숙자들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일마다 한인교회가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싼타아나 봉사현장에서 써니를 만난 지 3년이 됐지요. 써니와 함께 보낸 금년 수퍼보울 경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 주일 아침, 저는 식사 차례를 기다리는 긴 행렬 가운데 서있었습니다. 그날 화젯거리는 단연 오후 3시 반부터 시작되는 수퍼보울 경기였습니다. 18승 전승의 패트리어츠가 이에 도전하는 자이언트를 꺾고 과연 전승 신화를 이룰 것인가가 전 세계 미식축구 팬들의 관심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죠. 저는 고교 때 선수로 뛴 적도 있는 미식축구광입니다. 나의 머릿속은 오늘 어디 가서 그 경기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아닌 거리로 꽉 차 있었습니다. ‘토니! 텍사스에 두고 온 애인 생각하나?’ 제 앞에 종이 물수건을 손에 들고 써니가 씩 웃고 있었습니다. 식사 전 손을 닦도록 노숙자들에게 종이 물수건을 나누어 주는 것이 그가 맡은 일입니다. 그날 저는 그 심각한 고민거리를 쉽사리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써니가 피터와 저를 집으로 초청했거든요. 저희는 써니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피자를 먹으며 멋진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샤워하고 새 내의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써니는 저희들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토니에 이어 뒷자리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최 부인이 걸어 나왔다.
“고 김승민 씨와 3년 전 타계한 제 남편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제 남편은 침샘 암으로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2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4년 전에 타계 하셨어요. 수술 뒤 얼굴이 흉측스레 일그러졌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이란 별명까지 얻었었지요. 말수가 적어지고 바깥출입이 뜸해지더니 아예 방안에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어요. 우울증에 대인기피증마저 겹쳤습니다. 그런 생활이 7개월쯤 지속되었을 때 고인과 연락이 되었고 ‘화려한 외출’이라 명명된 작전이 은밀하게 진행되었죠. 대인기피증이 심화된 남편을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승민 씨가 우리 가족만 공원에 초청해서 마술공연을 하시겠대요. 그동안 할리웃에서 정통 마술을 배우셨는데 이미 취미수준은 벗어났다고 자신하던데요. 모처럼 야외에서 시원한 바람 쐬며 마술도 즐기고 옛날 얘기나 나누자는 거예요.’ 나의 설득에 남편의 반응이 뜻밖에 긍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5월 어느 토요일, 캘리포니아 남쪽에 있는 ‘오닐 파크’에 간이무대가 승민 씨에 의해 설치되었습니다. ‘최찬영 씨 환영 마술공연’이란 자그마한 플래카드가 나무 사이에 내걸렸고 주변 나무 가지에는 오색 테이프가 휘날렸습니다. ‘평생에 내 이름이 플래카드에 나붙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하며 한껏 기분이 고조된 남편은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고 맥주까지 곁들여 가며 갈비구이 점심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이어 승민 씨가 마술을 선보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신문 두 면을 손바닥 크기로 잘게 잘랐다가 감쪽같이 원상태로 복원 시키는 마술도 있었습니다. ‘야! 그것 봐라, 내 얼굴도 한번 그렇게 만들어 봐!’ 남편은 맘껏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오랜만에 맞은 유쾌한 하루였어요. 남편은 종종 그날을 회상하곤 했지요. 승민 씨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또 나누실 이야기가 있으시면……” 하고 말을 꺼냈을 때, 까만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 오른 팔을 살짝 들어 나에게 신호를 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와 함께 온 여인도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는 나에게 목례를 보낸 뒤 마이크를 사양한 채 입을 열었다.
“고인이 즐겨 들으셨다던 노래 두곡을 한번 불러 보고 싶어요.”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옆에 섰던 여인이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그들을 소개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실은 그들을 소개할 아무런 신상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향해 입을 떼려는 순간,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하이네의 시에 멘델스죤이 곡을 붙인‘노래의 날개 위에’가 독일어로 흘러 나왔다.
‘아우후 후뤼게른 데스 게상게스......’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귀에 익은 그 노래, 그 목소리!
“아! 그녀구나! 유옥희 씨!”
조객 가운데서도 자그마한 동요가 예서제서 파도처럼 일기 시작했다.
“유옥희 씨 아냐!”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는 천상에서 구름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 같았다. 조객들은 넋을 잃고 그녀에 빠져버렸다. 노래가 끝나자 약속이나 한 듯 실내가 떠나갈듯 열광적인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그녀를 간략히 소개했고 곧 이어 ‘사랑의 기쁨’이 흘러나왔다.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 하네......’
터지는 박수에 그녀는 앙코르 곡까지 선사했다. 앙코르 곡은 아버지가 뽑아 놓았던 찬송가‘놀라운 은혜’였다. 조객들은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장례식장이라는 사실을 모두 깜빡 잊고 있었다.
“만나 뵈어서 반가워요. 여러분들과 함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만들었네요. 제가 지금까지 섰던 어떤 무대보다도 감동적인 무대였어요.”
그녀는 우리가 미처 현실로 돌아오기도 전에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꿈결 같았다. 문득 아버지가 강조하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떠올랐다. 천부적 재능에 각고의 노력을 쏟아 세계정상에 우뚝 선 유옥희 씨도 ‘오블리제’를 항상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녀야 말로 아버지가 존경과 찬사를 보내고 싶어 하던 ‘노블리스’아닐까?
“유옥희 씨가 무대도 없는 장례식에 와서 조가를 다 부르다니…… 그녀를 어떻게 초청하셨지요?”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송 기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기적 같이 느껴져요?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도 계신데요.”
“목사님다운 대답이시네요.”
송 기자가 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전혀 연고가 없는 세계적 프리마돈나를 어떻게 감히 장례식에 초청할 생각인들 품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버지는 항상 듣던 그녀의 CD를 건네주며 그중 두곡을 이미 선별해 놓은 찬송가 두곡과 안배해서 장례식 때 들려주길 부탁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유옥희 씨 앞으로 이메일 한통을 띄었다. 아버지가 그녀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암으로 투병 중인 아버님의 마지막 부탁 가운데 당신의 노래도 들어 있어요. 장례식 때 옥희 씨의 CD에 담긴 ‘노래의 날개 위에’와 ‘사랑의 기쁨’ 두곡을 꼭 들려 달라고 하셨거든요. 당신의 노래가 메말라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게 감사할 뿐이에요. 아버님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옥희 씨의 노래를 듣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메일을 보낸 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 날 전화 한통이 장례식 순서지를 인쇄하고 있던 교회 사무실로 걸려왔다.
“김 목사님, 요즘 아버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나는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여자 집사님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돌아가셨는데요. 일일이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음 주 할리웃보울 공연이 있어서 로스앤젤리스에 머물고 있거든요. 이메일을 보고 꼭 연락드리고 싶었어요.”
“아니! 누구시라고요?”
유옥희 씨는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문이 막혀 버린 나를 위로했다.
“그리곤 소리 없이 장례식에 불쑥 나타나신 거예요. 참 멋진 분이라고 느꼈어요.”
송 기자에게 그간의 경위를 들려주는 나의 목소리는 당시의 감동이 되살아나며 떨려나왔다.
“꿈이 있는 곳에 꿈이 이루어집니다. 부친께서 관행을 깨듯 옥희 씨도 고정관념을 깼네요. 고정관념을 깨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요.”
송 기자가 팔짱을 낀 채 몸을 움츠리며 말을 받았다. 해가 떨어진지 한 시간 남짓 지난 뒤여서 싸늘한 바닷바람이 서서히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부친께선 노숙자에게 관심이 많으셨던가 봐요.”
“아버님이 묘지와 관 구입 등 장례비용을 절약해 남긴 돈이라며 노숙자 장례기금을 위해 기부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지요. 어머님과 의논해 조위금을 더 보태 한 자선단체에 전했습니다.” 이 계획은 장례식 때 조객들에게도 소개되었다.
공원묘지 서쪽 구릉 가까이 내려앉았던 태양이 능선 뒤로 사라져버리자 엷은 주홍색 노을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며 서서히 능선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잘 치러 주었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지, 오랜 관습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부질없는 짓처럼 보일 수가 있어. 그러나 역사는 이런 하찮게 보이는 작은 도전으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작은 물방울에 큰 바위가 깎이듯…… 모든 도전의 원동력은 사랑이야. 사랑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이지.”
아버지의 묘소에서 일어났다. 궁서체의 묘비명을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사랑은 결코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며 눈앞을 가로막았다. <끝>
황시엽
입상 소감
설익은 열매인 줄 빤히 알고 제 손으로 따서 맛보라 해놓고는 행여 누가 먹고 탈이나 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한입 베어 물다 뱉어버린다든가, 다 먹고 나서 배탈이 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용케 뒤탈은 면했다 해도 영양가는커녕 칼로리만 잔뜩 올려 주었다면 그도 못할 노릇이다. 한두 쪽 읽다 짜증이 나서 접어버릴 글, 다 읽고 나면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글, 그래서 작가라는 작자의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이면 속이나 후련해질 것 같은 글은 모름지기 지양해야 할 터인데……. 인공색소, 인공감미료, 방부제, MSG 따위는 가능하면 음식뿐만이 아니라 글 속에서도 절제하는 게 독자들의 정신 건강에 좋을 듯싶다. 글 속에 희망을 넣고 싶다.
태생의 증거라고 배꼽을 내보이고 나니 이젠 홀랑 벗어 보랄까봐 심히 겁이 난다. 창작의 고통과 기쁨을 일깨워 주신 이언호 선생님, 쟁쟁한 실력을 갖춘 나의 든든한 조언자인 글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입선의 순간까지 입김을 작용한 혐의를 받고 계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린다. 척박한 이민의 삶 속에서 창작의 길에 등대 역할을 묵묵히 감당해온 한국일보사와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신 심사위원께 사의를 표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