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왕자씨의 유족들이 1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
사망서 보고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11일(이하 한국시간)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북측 초병의 총격으로 남측 관광객이 사망하는 충격적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북측이 밝힌 사고 경위와 배경에 대해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곳이 해수욕장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이고, 희생자가 비무장의 50대 주부 관광객이라는 점에서 북측이 ‘과잉 대응’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1km까지 쫓아와 총격?
높은 철망 울타리 어떻게?
북, 4시간 지나서야 통보
■왜 새벽에 해수욕장으로 나갔나
첫 번째 의문은 이번 사고로 숨진 박왕자(53)씨가 이날 오전 4시30분에 비치호텔을 나서 금강산 해수욕장으로 나간 이유다. 현대아산은 호텔 내 감시카메라 확인을 토대로 박씨가 4시30분에 호텔을 나가 5시께 군사제한 구역의 울타리를 넘어가 피살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박씨가 왜 이른 새벽에 밖으로 나갔는지, 무엇 때문에 울타리를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주변 지인들조차도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북측의 설명에 따르면 박씨는 불과 30분만에 3.8km를 걸어갔다가 다시 1km를 뛰어 돌아왔다는 것인데 새벽에 50대 아주머니가 이같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북 초병 총격 대응 불가피했나
북측은 군사보호구역 내로 진입한 박씨를 초병이 발견하고 수차례 정지 명령을 내렸으나, 박씨가 도주해 공포탄으로 경고사격을 한 뒤 이어 총격을 가했다고 현대아산측에 설명했다. 초병의 근무수칙에 따라 대응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씨가 숨진 채 발견된 곳은 해수욕장에서 200m 떨어진 곳으로 무려 1km를 뒤돌아 뛰어오다 해수욕장에 거의 다 와서 쓰러졌는데, 이는 북측 초병들이 도망가는 박씨를 뒤따라가면서 조준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출이 빠른 요즘 사건 발생 시간인 오전 5시면 육안으로 어느 정도 식별이 가능해 북측 초병이 남측 관광객임을 알아봤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왜 굳이 사격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북측 사건 통보 왜 늦었나
또 다른 의문은 박씨가 오전 5시께 북측 초병의 총격으로 사망했는데 무려 4시간이나 지난 오전 9시20분에 남측에 통보한 점이다.
현대아산측은 이날 아침 인원 조사에서 박씨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소재 파악에 나섰지만, 북측이 직접 구두로 박씨의 사망 사실을 통보한 후에야 사건 발생을 알 수 있었다. 현대아산측은 5시께 박씨가 사망한 뒤 북측도 복잡한 지휘 체계 특성상 보고 절차를 밟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미심쩍은 대목이다.
■군사제한구역 울타리 관리 잘 됐나
남측 관광객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군사제한구역 통제 울타리에 대한 관리가 너무 허술한 게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북측 지역 진입을 통제하는 녹색 울타리는 2m 정도로 넘기 쉬운 높이는 아니지만, 별도의 철조망을 두르지 않아 일반인이 넘어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통과가 가능한데다 경고 팻말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객 안전교육 부실했다 지적도
현대 아산측 당혹
북한 초병의 총격으로 금강산 관광객이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지면서, 현대아산측의 관광객 안전 교육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숨진 박왕자씨의 동료 여행객들은 11일 저녁(이하 한국시간) 서울에 도착해 “피격 장소인 해안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여행객 권태진(55·여)씨는 “가이드건 정부건 그 누구도 우리에게 그쪽(박씨가 숨진 장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해줬다”고 밝혔다. 또 박씨가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통제구역 펜스에도 ‘통제구역이니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경고 팻말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금강산 특구 주변이 워낙 넓지만 사건이 발생한 해안처럼 관광객이 넘어가기 쉬운 지역에는 경고 표지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강산 관광 사고 일지
▲1999년 6월 관광객 민영미씨 북측에 억류. 40여일 관광중단.
▲2003년 4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60여일 관광중단.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 자살 이후 1주일간 관광중단.
▲2004년 10월27일 60대 관광객 계곡에 빠져 사망.
▲2005년 6월5일 관광객 정모(37)씨 사망. 심장마비 추정.
▲2005년 12월27일 현대아산 협력사 직원 정모(32)씨 승용차로 북한 군인 치어 1명 숨지고 2명 부상. 정모씨 억류 끝에 45일만에 귀환.
▲2006년 2월27일 만물상 관광객 오모(57)씨 사망.
▲2007년 7월20일 만물상 관광버스 전복해 대학생 등 6명 부상.
▲2007년 10월15일 구룡폭포 인근 무룡교 와이어 끊겨 20여명 추락. 3명 중상.
▲2008년 7월11일 관광객 박왕자(53)씨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
사망한 박왕자씨의 시신이 한국시간 11일 서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도착, 관계자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 <연합>
전직 경찰 남편과 검소하게 살아
피살된 박왕자씨는
11일 새벽 북한군의 총격으로 피살된 박왕자(53)씨는 전직 경찰관인 동갑내기 남편과 23세의 대학생인 외아들과 함께 살아온 예의 바르고 알뜰한 주부였다고 주변은 전했다. 박씨는 가까운 고교 동창들과 함께 오랫동안 별렀던 금강산 관광에 나섰다 변을 당했다.
박씨는 사고 전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내일 아침에 일출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함께 간 관광객들은 전했다. 박씨가 살던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아파트 주민들은 사고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박씨의 아파트 단지 부녀회장인 채영순(51)씨는 “박씨는 매우 얌전하고 착한 사람이었다”며 “경찰이었던 남편 월급을 한두 푼씩 모아 절약하고 저축하는 게 낙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씨 바로 옆집에 사는 주부 김모(62)씨도 “항상 신문이나 잡지에서 쿠폰을 오려 장을 보러 다니고, 떨어진 옷은 바느질해서 입을 정도로 검소했다”며 “한마디로 현모양처였다”고 말했다.
박씨의 외아들 방재정(23)씨는 “나 때문에 고생만 하고…, 정말 오랜만에 간 여행이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울먹였다. 박씨의 남편 방영민(53)씨도 “여행갈 때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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