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나온 영화중에 ‘아킬라와 비’라는 영화가 있었다. 사우스 LA의 흑인 소녀가 스펠링 비에 나가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는 과정을 그린 가슴 따뜻한 이야기이다.
11살의 소녀, 아킬라는 당차고 똑똑한 소녀이지만 성장환경이 바닥이다. 아빠는 일찌감치 죽었고, 엄마는 아이를 거의 방치하는 수준이며, 오빠는 동네 갱단원이다. 학교나 동네 분위기 역시 스펠링 비 같은 학구적 대회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중에는 동네사람 모두가 아킬라의 단어 외우기를 도와주고 응원하면서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불가능을 함께 현실로 만들어 낸다는 내용이다.
그 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스펠링 비를 앞둔 학생들의 세가지 유형이었다.
첫째는 아킬라와 같은 빈민촌의 학생들. 패배의식에 세뇌되어 도전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아킬라라는 별종을 제외하면 꿈도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유형이다.
둘째는 유복한 환경에서 삶을 즐기는 유형. 영화에서 소년은 스펠링 비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목을 매지는 않는다. 전국 대회에서 중도 탈락하자 그는 ‘재미있었다’고 익살을 떨며 퇴장한다. 실력 있고 대인관계도 좋아 성공할 유형이다.
세 번째는 중국계 아버지를 둔 소년. 실력이 탁월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전국대회 우승’을 목표로 한순간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아버지의 집요한 ‘교육열’ 덕분에 아이는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실력은 인정받지만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하루라도 일을 쉬면 괜히 불안한 1세들, ‘A’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는 2세들 - 보편적인 한인들이 어느 유형일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US 여자오픈에서 박인비(19) 선수가 대회 사상 최연소 우승을 하면서 코리안 여자골퍼들의 실력이 또다시 확인되었다. 지난 1997년까지만 해도 LPGA 투어에 한국 선수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지난 10년 사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이번에 박인비가 우승 소감에서 말했듯 모두가 ‘박세리 현상’ 덕분이다. 1998년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을 보며 저마다 ‘제2의 박세리’가 되려는 꿈들이 LPGA 출전선수의 거의 1/3을 코리안으로 채우는 기현상을 낳았다. 특히 리드보드를 보면 줄줄이 Park, Kim, Lee, Choi, Jang … 이어서 한국 대회인지 미국 대회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LPGA 투어가 더 없이 친근해진 반면 기존의 미국 여자골프 팬들은 마땅찮은 심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들의 불만은 이렇다. 한국선수들은 이름이 낯설어 외우기도 힘든데다, 영어를 못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선수로서 매력이 없고 그러다 보니 LPGA 투어가 재미없어진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한국선수들이 떼로 쳐들어와 상금만 챙겨간다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골프 팬들도 있다.
미국 골프 전문가들의 칼럼이나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면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선수들은 더도 덜도 아닌 ‘스펠링 비’의 세 번째 유형이다. 무섭게 훈련을 다그치는 부모 밑에서 죽기 살기로 연습한 덕분에 골프 실력은 뛰어나지만 개성미도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는 ‘골프 기계’ 같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우리는 물론 할 말이 있다. 그런 피나는 노력 없이 어떻게 LPGA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겠는가. 영어실력으로 경기하는 게 아닌 이상 영어 배울 시간 아껴서 골프 스윙 한 번 더 연습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 선수들이 대회를 휩쓴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 미국 선수들의 실력을 기르면 되지 않느냐 …
그렇기는 해도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 골프팬들의 불평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소렌스탐이 스웨덴 태생이면서도 미국에서 ‘골프 여제’로 불변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탁월한 골프 실력과 아울러 완벽한 영어로 미국 팬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인비가 액센트 없는 영어로 우승 소감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시작이다. ‘골프 기계’ 이미지는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1세대 골퍼들에서 끝내야 하겠다. 박인비, 앤젤라 박 등 2세대 골퍼들은 골프 실력 못지않게 미국 선수들, 미국 팬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썼으면 한다. 그래서 소렌스탐이나 오초아 같은 인기 선수가 장차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나와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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