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무겁게 깔려있다. 뙤약볕이 파킹랏의 아스팔트를 쪼고 있는데, 이 더운 날,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선 떠오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집에 없었다. 그렇게 두서너 명에게 더 연락했으나 역시 부재였다. 다시 셀폰 번호를 돌렸다.
“어디에 있니? 뭐가 그리 바빠?” “나 오늘은 마사지하러 나왔어. 어제는 정희를 만났고, 그저께는 뭘 했더라, 아 새로 오픈한 글렌데일의 아메리카나 백화점 구경 갔었지. 아무튼 바쁘게 지내고 있어” “그래 잘 했다”고 말하고 생각하니 그 친구의 들뜬 분위기에 나까지 숨이 가빠 온다.
하긴 미국사람들은 일과 생활의 즐거움을 삶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고 일상화해서 즐기며 사는데 비해, 이민 온 우리는 삶의 즐거움은 은퇴 후로 미룬 채, 매일 매일만을 바라보며 충실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친구의 바쁜 일상에 축복 있기를…
서울에서 갓 돌아온 친구 말로는, 일부 서울 주부들의 생활관은 아주 초현대적이란다. 인생에서 즐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집에 박혀 있는 것은 바보란다. “세상을 맘껏 보고, 하고 싶은 것 맘껏 하고, 맘대로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집을 지키고 있나. 우리가 이조 시대 사람인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누구를 위해서 고생하나. 일회성의 인생 맘껏 향유하며 사는 거야! 돈은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라는 식이다.
데카당스의 물결이 한반도에 상륙한 것일까. 사실 오늘의 우리는 물질문명의 영향으로 세속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중심이 되어 안락하게 살고 생을 즐기는 생활이 최대의 행복을 가져오는 진리로 생각해서 재물이 우리생활을 움직이는 기본 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래쉬 교수는 <자기도취의 문화>란 책에서 현대문명을 ‘자기도취에 빠져 막다른 골목으로 향해 달리는 행복추구자의 사회’ 라고 특징짓고 있다.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자기도취에 빠져 사랑을 나눌 줄 모른다. 아니 자기희생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에 인색해서 사회적 의식이나 남을 위한 봉사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타오르는 일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계속 빛나는 일이다./ 사랑 받는 일은 점차 쇠멸해 가지만, 사랑하는 일은 지속된다”<’말테의 수기’에서>
그럼 돈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게 될까?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맘껏 사는 사회 속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은 국가나 남을 원망하며, 일하지 않고 돈 많이 번 졸부들을 질시하지는 않을까? 그런 결과로 빈부차이에서 오는 반목이 일어나고, 그게 원인이 되어 데모를 한다면 죽기 살기로 매달려 사회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다.
집요하고 불안한 촛불시위를 보며 느껴지는 것은 이유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이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어두운 동굴 속을 달리는 주자들 마냥 안타깝다는 것이다. 과연 동굴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빛나는 태양일까?
발달된 인터넷 정보로 단체행동을 하는 일부 시위행위는 또한 멀리 BC 4-5세기경의 아테네의 토론광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스스로 그 법을 존중하여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말을 인격화한 그는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철학자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젊었을 때 일하느라고 놓쳤던 것, 배우고 싶었던 일, 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느라 노후가 더 분주하다고 한다. 특히 이민 1세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아쉬움을 참고 현재를 희생해서 살아오면서 빈 공간을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며칠 전에 온 이 메일을 되새겨본다. 똑똑한 사람은 예쁜 사람을 못 당하고, 예쁜 사람은 시집 잘 간 사람을 못 당하고, 시집 잘 간 사람은 자식 잘 둔 사람을 못 당하고, 자식 잘 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을 못 당하고, 건강한 사람은 세월 앞에 못 당한다.
갑자기 빨리 가는 세월에 대한 불안감이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가슴에 스며든다.
김인자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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