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Old State House Museum내에 전시된 폴 리비어의 판화 앞에 서 있다. 보스턴에서 영국군이 쏜 총에 의해 5명의 군중들이 숨진 사건을 대학살이라고 선동하기위해 과장되게 그려진 그림이다.
주온경 데이비슨 초등학교 도서 미디어교사
미국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미국독립혁명(American Revolution)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의 사회과목 커리큘럼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약 233년전에 렉싱턴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운명이 바뀌게 됐다. 오늘날의 미국이 있게 된 데에는 유명한 정치인들과 군인들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애국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필자는 보스턴과 보스턴에서 30분 거리인 렉싱턴 광장과 콩코드의 교각 및 민병대원의 동상 등 미국역사의 자취를 답사하고 미국독립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보스턴 대학살과 보스턴 티 파티
영국이 북미에 설립한 13개의 식민지들 중 첫번째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1607년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거주민들이 처음 도착한 이래 약 160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고 살았다.영국은 영국 식민지 거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와 그들에 협조한 미 원주민들을 상대로 신대륙의 땅을 놓고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1763))을 벌인 끝에 전쟁에서 이겼다. 그러나 땅을 차지한 영국이 전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그 중 매사추세츠주 식민지가 가장 심하게 항거했는데, 1768년부터 영국군이 보스턴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영국군과 시민들 간의 긴장과 마찰이 고조돼갔다.
1770년 3월 보스턴 시민들이 보스턴 세관 앞에서 호위하던 소수의 영국군들을 밀며 조롱하면서 눈덩이를 던진 것이 한 영국군에 맞아 넘어지자 옥신각신 끝에 영국군들이 총을 발사, 5명의 보스턴시민이 사망한 사건을 놓고 폴 리비어는 이를 판화로 제작, 보스턴 대학살(Boston Massacre)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이 사건은 식민지인들의 영국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켰으며 식민지들이 단결하여 영국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의회에서 식민지에 대한 조세를 철회하고 영국에서 들어오는 차(tea)에 대해서만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을 때 1773년 12월 사무엘 아담스가 이끄는 군중들이 미원주민 복장을 하고 차가 실려 있던 배에 올라가 영국에서 수입된 차를 보스턴 항구에 버린 사건(Boston Tea Party)이 일어났다. 3개월 후 보스턴의 존 행콕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곧이어 13개 식민지 전역에 걸쳐 민병대(militia)들이 결성되어 영국과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폴 리비어의 역사적인 야간주행
그러던 중 1775년 4월 14일,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총독으로 있던 토마스 게이지 총사령관이 영국의 조지 3세와 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매사추세츠의 반란군(rebel)들을 공격하라는 기밀명령을 받았다. 게이지 사령관은 4월 18일 밤 프란시스 스미스 중령의 휘하에 있던 700명의 군대로 하여금 그당시 렉싱턴에 있던 사무엘 아담스와 존 행콕을 체포하고, 렉싱턴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콩코드에 숨겨놓은 미국 민병대들의 군수품 등을 파괴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영국은 미 식민지 거주자들이 영국 정규군과의 싸움에서 도망갈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인 민병대들도 그들이 막강한 영국군과 대결해서 이길 수 있을 지 확신이 없었다.
영국군이 다음 날 아침이면 미 독립운동의 주동자 사무엘 아담스와 존 행콕을 체포하고, 미국 민병대들의 군수품을 파괴시키려 한다는 정보를 미국측에 빼낸 사람은 영국측의 게이지 사령관의 미국인 부인으로 추측되고 있다. 뉴저지 출신인 마가렛 여사는 남편의 조국인 영국과 자신의 조국인 미국 사이에서 조국인 미국을 선택했던가보다. 그녀는 미국 민병대를 진압하려는 남편의 계획을 무산시키고자 의사인 조셉 워렌에게 이 기밀을 알리고 워렌은 다시 보스턴의 은세공인이자 애국자들의 연락병이었던 폴 리비어에게 두가지 부탁을 한다.
첫째, 렉싱턴에 있는 사무엘 아담스와 존 행콕에게 이 사실을 알려 대피하도록 하고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 및 애국자들에게 영국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리라는 것이었다. 1775년 4월18일 밤 10시에 보스턴을 떠나기 전 폴 리비어는 친구의 집에 들러 등불을 두 개 켜시오라고 외쳤다. 친구가 교회당(Old North Church)의 뾰족탑에 두 개의 등불을 달았던 것은 보스턴 지역의 애국자들에게 영국군이 배를 타고 보스턴을 떠나 육지로 들어온다는 신호였다. 만일 영국군이 육로로 이동하려했다면 폴 리비어는 등불 하나만 켜라고 했을 터였다.
40세의 폴은 보스턴에서 렉싱턴으로 가기위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밝은 보름달아래 그의 두 친구가 그를 보트에 태우고 찰스강을 건너 찰스 타운으로 데려다 줬다. 거기서부터 그는 가장 빠른 말을 빌려 타고 렉싱턴까지 13마일의 역사적인 주행(Paul Revere’s Ride) 을 시작했다. 캠브리지 근처에서 갑자기 영국군들이 큰 나무 뒤에서 나타나 폴을 잡으려 했으나 아주 빠른 말인데다가 그 말을 잘 타는 폴은 길을 바꿔 타고 그들을 따돌렸다. 그의 말발굽 소리는 듣는 이들에게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경고로 들렸다.
길을 떠난 지 두 시간 만인 12시 자정에 폴은 행콕과 아담스가 머물던 렉싱턴 소재의 주택에 도착해 영국군이 쳐들어 올 것임을 알렸다. 행콕과 아담스는 마차를 타고 도주하였고, 곧바로 렉싱턴의 민병대들에게 영국군에 대비해 무장하도록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로부터 1시간 후인 4월 19일 새벽 1시 콩코드로 향하던 폴 리비어는 길에서 의사인 사무엘
프레스캇을 만났다. 영국군에 의해 검문을 받느라 콩코드로 떠나지 못했던 폴 대신에 프레스캇이 영국군 몰래 돌담을 넘어 숲속과 늪을 지나 새벽 2시에 콩코드에 도착하여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콩코드에도 경고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이 울리자 마을 사람들은 헛간과 가정내에 비치해두었던 군수품들을 숨기고, 콩코드의 민병대들은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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