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야이든 스포츠맨십이란 게 있는 데 그게 안보여요”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힐러리 로댐 클린턴. 민주당 경선이라는 무대에서 하직 인사를 하고 내려올 때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이다.
힐러리가 패배를 인정하고 젊은 후배를 밀어줌으로써 민주당의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기를 기대했던 유권자들은 실망을 하고 있다. 힐러리는 “계산상 역전은 불가능하다. 물러나라”는 지적이 줄곧 나왔던 5월을 그대로 보내더니, 경선이 막을 내리고 버락 오바마가 공식 후보로 확정이 된 지난 3일 밤 역시 그대로 보내고, 그로부터 나흘 후인 7일을 ‘중대 발표’의 일정으로 잡았다. 하지만 배포된 보도 자료의 제목은 여전히 ‘캠페인 행사’이고, 힐러리의 연설 또한 깔끔한 패배 인정이라기보다 오바마 지지, 작별 인사, 앞일에 대한 구상 등을 두루 섞은 복합적 내용일 것이라는 게 뉴욕타임스의 5일 예상기사였다.
2008년을 ‘대통령 되는 해’로 삼았던 그의 일정표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힐러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졌다. 다음 기회를 보자”며 툭툭 털어내기에는 집착, 분노, 질투, 아집 같은 눈먼 감정의 족쇄가 그를 너무 단단하게 옭매고 있는 것 같다.
지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이길 때는 누구나 여유 있고 너그럽지만 그 사람의 진짜 사람됨이 드러나는 것은 질 때이다.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은 쓰린 마음을 말갛게 다스리며, 나를 패배시킨 ‘적’에게 축하를 보내는 일은 인간적 성숙 없이는 불가능하다. 때로는 어려서부터의 훈련이 ‘멋진 패자’를 만들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CEO 중 한명인 잭 웰치 전 GE 회장은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의 늦둥이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아들 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잭이 고향인 매서추세츠, 샐렘에서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팀 주장이었을 때의 일화이다.
라이벌 고등학교 팀과 엎치락 뒤치락 시합을 끌고가던 그의 팀은 거의 이길뻔 하다가 연장전에서 지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잭은 하키 스틱을 빙판에 내동댕이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그를 뒤쫓아 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잡은 사람이 어머니, 그레이스 웰치였다.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면 너는 절대로 승리하는 법을 알 수 없을 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더 이상 경기를 할 자격이 없다”고 어머니는 호되게 꾸짖었다.
웰치는 이때 어머니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았다고 한다. 멋지게 이기고 깨끗하게 지라는 교훈이다.
최악의 손님은 찾아와서 갈 생각을 안 하는 손님, 최악의 정치인은 선거에서 지고도 물러나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한다. 좀 미련이 있더라도 결과에 승복하는 대범한 자세는 스포츠맨십이자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민주당은 지난 두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멋진 패자’의 모범을 보여준 아름다운 전력이 있다. 2000년 앨 고어가 그랬고, 2004년에는 존 케리가 그랬다.
4년 전 케리는 하룻밤 ‘대통령’이었다. 선거 당일 밤까지만 해도 케리는 승리가 확실해서 당선 인터뷰 하느라 바빴고 부시는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다음날 오하이오 개표결과가 뒤늦게 나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케리는 13만여 표로 뒤지고, 개표를 앞둔 잠정표는 20여만 표에 불과했다. 재검표 해야 한다, 무효표 가려내자, 법정에서 가리자 … 잡음이 벌써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케리는 즉각 용단을 내려 패배를 인정했다. 나라가 또 다시 선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시절 따라 피고 지고 떨어지기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떠밀려 나가지 않고 모두 때 되면 스스로 걸어 나간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단풍 드는 날’ 중)고 도종환 시인은 노래했다.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기도’ 중) 라고 타고르는 기도했다.
이기는 데 필요한 게 능력이라면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이다. 패배도 축복이 될 수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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