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센트럴 팍을 거닐던 한 청년이 개에 물려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소년을 목격했다, 청년은 달려들어 개를 죽이고 소년을 구해냈다. 뉴욕 신문의 한 기자가 이 청년 영웅을 인터뷰하고 그 자리에서 기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문장은 ‘뉴욕 양키스 팬이 위험에 처한 소년을 구해냈다’였다.
이것을 본 청년은 자기는 양키스 팬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자 기자는 레인저스(뉴욕 하키팀) 팬으로 고쳤다. 레인저스 팬도 아니라고 하자 기자는 “그러면 닉스 팬이냐”고 물었다. 닉스는 뉴욕의 NBA팀. 청년은 자기가 보스턴에서 왔노라고 밝혔다. 다음날 신문에는 이런 헤드라인이 올랐다. ‘보스턴에서 온 야만인이 우리 뉴욕의 개를 죽였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간의 라이벌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머이다. 두 도시 간의 라이벌 의식은 못 말릴 정도이다. 프로야구 초창기 베비브 루스의 트레이드를 둘러싸고 쌓이기 시작한 감정적 앙금은 단순한 라이벌 의식을 넘어 자존심 싸움이 되고 있다.
메이저리그의 대표적 견원지간으로 양키스와 레드삭스가 있다면 NBA에는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가 있다. 두팀은 1980년대 NBA 중흥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1960대까지 프로농구를 지배했던 절대 강자는 셀틱스였다. 그러나 이 시기 프로농구는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NBA가 현재와 같은 거대 시장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레이커스와 셀틱스간의 라이벌리가 형성되면서부터였다. 흥행의 견인차는 레이커스의 쇼타임을 이끌었던 불세출의 가드 매직 잔슨과 백인들의 영웅이었던 셀틱스의 래리 버드였다. 커림 압둘 자바와 제임스 워디, 대니 에인지, 케빈 맥헤일 등은 주연급 조연들이었다.
두 팀 간에 라이벌 전선이 형성되면서 NBA의 인기는 치솟았고 여기에 걸출한 CEO형 커미셔너 데이빗 스턴이 등장하면서 NBA는 3대 프로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두 팀 간의 경기는 흥행 보증수표였고 팬들의 피는 뜨겁게 끓어올랐다. 지금은 거대기업으로 자란 스포츠 게임회사 EA의 첫 제품이 ‘레이커스 VS 셀틱스’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1990년대 들어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부활하는데도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못 말리는 라이벌 관계가 한몫했다. 양키스에 비해 처져있던 레드삭스가 2000년대 들어 강팀으로 태어나면서 두 팀 간의 대결은 가을시리즈로까지 연장되고 있다. 메이저리그에는 단비가 아닐 수 없다.
스포츠, 특히 프로스포츠는 라이벌 관계를 자양분으로 해 자란다. 인간에게는 잔인성과 야성이 내재돼 있다. 이런 성향을 문명화된 방법으로 풀어주는 것이 스포츠이다. 스포츠를 직접 하면서, 혹은 관람하면서 꿈틀대는 야성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특히 프로스포츠에서 연고지는 곧 영역을 의미한다. 라이벌 스포츠 팀 간의 대결은 영토를 놓고 벌이는 문명화 된 전쟁인 셈이다. 그러니 라이벌과의 대결은 여느 팀과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었다 하면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되곤 하는 것이다.
2007~2008 NBA 결승에서 레이커스와 셀틱스가 만났다. 두 팀은 5일부터 시리즈에 돌입한다. 두 팀이 다시 결승에서 만난 건 1987년 이후 처음이다. 레이커스는 이후에도 여러 번 우승했지만 셀틱스가 추락하면서 두 팀은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올 시즌 시도한 과감한 ‘인적 쇄신’이 결실을 거둬 라이벌 시리즈가 재현된 것이다.
21년 만에 성사된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대결은 한껏 기대감을 높여준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은 두 팀 간의 대결을 보면서 프로농구의 재미에 눈을 떴다.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레이커스와 스퍼스의 서부 컨퍼런스 4차전 경기 종료 직전 레이커스가 명백한 파울을 했는데도 심판이 휘슬을 불지 않자 ‘음모론’이 쏟아져 나왔다. 레이커스와 셀틱스의 대결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는 의혹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두 팀 간의 대결이 팬들과 NBA, 그리고 중계 방송사 등 모두가 꿈꾸던 시나리오였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결승 시리즈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두고 볼 일. 그러나 작품성은 그리 중요치 않다. 노스탤지어만으로도 설렘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런 만큼 흥행은 이미 보장돼 있다. 19년 만에 다시 나온 영화 ‘인디애나 존스’가 만화 같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해 돈을 갈퀴로 긁고 있듯이 말이다.
요즘처럼 살기 팍팍한 시절에 스포츠를 통해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을 잊고 노스탤지어에 젖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위로가 된다. 이것은 스포츠와 영화가 지닌 생명력이기도 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