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 파킹랏 6월의 담은 하루의 햇살을 다 받아 제 몸을 달구고 있었으므로 등 시린 이들이 찾아와 따스운 담을 따라 하루 종일 해바라기가 되곤 한다. 멕시코 내륙 먼 곳으로부터 툴툴 먼지 뿌리는 버스를 타고 티화나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이틀을 머문 뒤에 8명과 함께 3박4일 산을 타고 넘어온 호세가 우리 마켓에 들어섰을 때 그는 미국에 들어섰다는 기쁨보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거의 정신이 없었다.
고기 한 조각과 또띠아 그리고 24온스짜리 싸구려 캔 맥주를 사들고 그는 뒤 파킹랏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는 밥보다 먼저 맥주를 정신없이 마셨다. 여름이 시작되면 마켓 안은 늘 더웠으므로 철문은 활짝 열어놓고 방충문은 닫고 있었는데 그 방충문으로 무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웅얼대는 소리처럼 들렸는데 그 웅얼거림 속에 가락이 들어 있었다. 나무도마에 앉아있던 나는 귀를 기울이다가 그 웅얼거림이, 그 가락이 너무도 귀에 익어 나도 모르게 일어나 뒷문으로 다가갔다. 호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방충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씨익 웃으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멕시코에서 갓 넘어온 그가 아리랑을 부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음정 박자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아리랑을 부르는 것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손과 발을 움직이며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20여년 전인가, 호세가 멕시코 고향 읍내에 와 있던 한국인들의 사무실 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한국인 중 닥터 리가 술좌석에서 부르는 것을 처음 듣는 순간 그 노래가 그렇게 가슴을 울렸다고 했다. 닥터 리를 졸라 아리랑을 배웠고 술만 마시면 아리랑을 불렀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가사도 잊어버리고 오로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까지만 불러대고 있었는데, 이번 티화나에서 산을 넘는 8명 가운데 한국인이 한 명 있는 것을 알았고 3박4일 함께 지내면서 다시 아리랑을 배웠다고 했다.
둘이는 한 조가 되어 안내원의 지시대로 움직이면서 가시덤불 속에서 아리랑을 웅얼거렸고 국경 경비원의 서치라이트가 공지를 핥고 지나가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면서도 아리랑을 생각했다고 했다. 바위 밑에 움츠리고 밤하늘의 별을 볼 때는 입에서 저절로 아리랑이 흘러나왔다고 했다. 이곳으로 건너와 모두 뿔뿔이 흩어질 때 그 사람이 어깨춤을 추면서 아리랑을 불러주었다고 했다.
호세는 한국말도 몇 마디 알고 있었다. 닥터 리가 가르쳐 준 말 중에 아직도 호세가 알고 있는 것은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였다. 호세는 나를 보고 ‘아버지’하고 불렀는데 실제로는 어떤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호세 나이나 내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호세가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나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는데 아리랑이 제일 좋아요. 내가 아리랑 부르니까 아버지가 좋아해요.” “어떤 아버지?” “여기까지 오면서 마켓 서너 군데 들렀어요. 아버지는 모두 아리랑 좋아해요.” “왜 안 그러겠니. 나도 너의 노래를 듣고 놀라고 반가웠는데.”
그날 호세는 하루 종일 담에 등을 대고 있었다. 산을 타고 오느라 시리고 고된 등을 녹이고 있었다. 내가 몇 가지 음식을 갖다 주자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며 맛있게 배를 채웠다. 다음 날 다시 올까 싶었는데 호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아리랑 호세를 보신 분이 계신지요? 키는 나보다 더 작고 눈이 크면서, 오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한국 남자만 보면 아이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아버지’하고 부르는 정말로 착하게 생긴 호세. 아리랑을 부를 때면 지그시 눈을 감고 어깨를 들어 올리는 호세. 이따금 카슨, 몬테벨로, 가디나 등 한국 분들이 마켓하는 곳에서 아리랑 호세를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호세는 아닌 것 같은 그들.
오호, 그럼 혹시 호세는 다른 일 다 집어치우고 아리랑 노래 강사로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아리랑 하나 기막히게 잘 부르는 그를 만나면 알려 주세요. 막걸리 한 사발 한 손에 들려주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