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이 올라갈수록 밑의 풍경은 더욱 작아 보인다. 같은 눈높이에서는 커 보이던 대상도 높은 곳에서 보면 작고 하찮아 보인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출세하더니 달라졌다”는 얘기를 듣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엘리베이터 효과’ 때문이다.
조직원들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며 ‘머슴론’을 입에 올리던 사람도 막상 자리가 높아지면 달라지기 일쑤이다. 그래서 주인이 오히려 머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만과 독선이 움트는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의 자리야 말해 무엇 할까. 이것을 경계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 사람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다.
대기업의 경영자로 취임하는 스티븐 카우프만에게 친구가 이런 조언을 들려줬다. “앞으로 자네는 두 가지를 더 이상 구경하지 못할 것이네. 하나는 싸구려 식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실이지.” 친구의 충고를 가볍 게 여겼던 카우프만은 취임 후 그 충고의 의미를 뼈저리게 확인한다.
자리가 높아지면 주위의 대접이 달라진다. 모든 것이 최고급이 되고 듣기 좋은 말만 귀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이런 대접이 어느덧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럴수록 현실 인식은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노무현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예고편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칼럼을 쓴 것이 몇 개월 전인데 그 우려가 벌써부터 현실화 되고 있다. 집권 초반 대통령의 지지율이 25%도 안 된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고 있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의 본질은 쇠고기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들 간의 엇박자이다. 이 파동은 취임 전부터 시작된 엇박자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일 뿐이다.
난맥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고 원인은 소통의 부재이다. 대통령은 13일 그동안 국민들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소통은 물결과 같다. 큰 소통은 작은 소통으로부터 번져나간다. 국민들과의 소통 부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측근들과의 소통 부재에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 하나 나서서 대통령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와 독단에 브레이크를 거는 용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중세 유럽의 궁정에서는 광대들이 이런 역할을 했다. 광대들은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이너였지만 동시에 군주의 전횡을 바로 잡는 ‘바른 입’이기도 했다.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조롱과 풍자를 통해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혼자 갇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카우프만의 친구가 했던 충고는 바로 이런 고립에 대한 경계였다. 측근들이 입을 닫아버릴 때 대통령은 현실감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곧바로 국민들과의 소통 부재로 이어진다.
요즘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머리가 뛰어나지 못한 자들은 너무 독단적이고 머리가 좋은 자들은 너무 앞뒤를 가리는데 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촌철살인의 지적이다.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은 독단적이고, 입을 열어 바른 소리와 쓴 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이들은 침묵하면서 보신에만 급급하다. 참모들이 광대 역할을 해야 한다. 옛궁정 광대들처럼 목숨 거는 일도 아니고 기껏해야 자리 아니던가.
그리고 대통령도 국가 운영의 근본적 자세를 되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혼자서 결론 내리고 들어가는 그의 스타일이 측근들의 간언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모두가 침묵하거나 모두가 찬성할 때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경보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니 왕위에 오르기 전 충녕대군이 한 측근에게 “부디 나의 독선과 오만과 과오를 베어 줄 칼이 돼 달라”고 당부하는 대사가 나온다. 작가가 작금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대사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통령을 비롯한 최종 결정권자들은 이런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의 어떤 기업들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무조건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을 지정하기도 한다. 집단사고와 독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이들은 ‘현대판 광대’라 할 만하다. 반대의견에 귀를 막아 버리면 점차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겨 균형감각을 잃게 된다. 그런 운전사가 모는 버스를 탄 승객들은 심한 멀미를 할 수밖에 없다.
귀를 열고 입을 여는데서 비로소 소통은 시작된다. 하나라도 닫혀 있으면 소통이 아니라 그저 일방적 외침이나 침묵일 뿐이다. 이런 원리가 국가 경영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터.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 보는 삶의 지혜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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