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 기초한 결정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성만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뇌 손상으로 이성적 능력은 살아 있지만 감성은 무력화 된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신경학자이다. 그가 오랜 기간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고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환자들의 감성 결여가 결정 능력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능력을 무력화 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성만 가지고는 이리저리 따지고 재다가 오히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기 십상이다. 회전하는 트레드밀 위에서 내려서지 못한 채 계속 달리는 모습과 같다. 우리들이 내리는 많은 선택은 이성의 힘을 가장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배짱이나 순간적 느낌 같은 감성적 요소에 의해 이뤄진다.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다. 성능을 요모조모 따지지만 물건이 주는 느낌과 이미지도 중시한다. 감성적 요소가 구매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정치 또한 이성과 감성이 혼재해 있는 영역이다. 개별적인 유권자들이 항상 합리적으로만 사고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보들이 내건 정강과 공약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때때로 단지 후보가 잘 생겼다는 호감 때문에 표를 던지기도 한다. 국민 여론의 집약물인 여론은 개개인보다 한층 더 감성적 경향을 보인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훔치려면 감성적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당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버락 오바마에 끌려가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열정’과 같은 감성보다, ‘메시지’라는 이성에 토대한 캠페인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정치인으로 성공하는데 있어 감성에 대한 이해는 좋은 공약보다 훨씬 소중한 자산이다. 똑똑한 고어를 누른 단순한 부시는 바로 이런 자질에서 상대를 조금 앞섰다.
정치의 영역에서 감성은 이렇듯 중요하다. 하지만 감성이 지나칠 경우 정치는 자칫 ‘저급화’ 되고 유권자들은 ‘우민화’ 된다. 어제 치러진 한국 총선은 감성 과잉의 이벤트였다. 후보의 개인자질과 정책은 보이지 않고 지연·학연, 그리고 특정 정치지도자에 대한 호·불호가 ‘지역 일꾼’의 당락을 좌우한 이상한 선거였다.
이번 총선을 뒤덮은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은 감성 과잉 정치의 절정이었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의 후보가 앞 다퉈 박근혜 사진을 내거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고 ‘박심’을 얻지 못한 집권당에서 그의 여동생을 내세워 ‘짝퉁 마케팅’을 벌이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다. 한나라당에 복수하겠다며 칼날을 세우던 일부 친박 후보들이 막바지에 한나라당을 돕는다며 후보를 사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유권자를 우습게 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정치의 희화화이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도 감성 과잉의 가장 어두운 면은 역시 ‘지역주의’였다. 집권당 대표라는 사람이 영남에 내려가 “지난 10년간 받은 핍박을 이번에 보상 받아야 한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자 한때 ‘원칙’과 ‘대쪽’ 이미지로 정치생명을 이어 왔던 충청권 정당대표는 “충청인의 자존심을 되찾자”고 부추기고 나섰다. 표만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우는 ‘원칙’인지 묻고 싶다.
지역주의의 망령 하면 뿌리가 꽤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71년도 대통령 선거를 보자. 선거전 막바지에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전단지가 뿌려지는 등 혼탁했지만 호남 유권자의 32%가 박정희를 지지했고 부산에서는 42%가 김대중에게 표를 던졌다. 유권자들은 이렇듯 성숙한 균형 감각을 보였다. 불과 30여년 전이다.
그러나 지금 정치인들은 필요하다 싶으면 지역감정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다. 유권자들이 과거의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이런 부추김에 장단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지만, 그들은 섬기는 방법보다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에 더욱 정통한 집단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이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꿰뚫고 있다.
원초적인 두려움과 이유 모를 적대감, 그리고 동정심과 향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감성적 카드를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그때그때 필요한 버튼을 눌러 댄다. 선거에서 이기면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4년 후 똑같은 카드를 꺼내든다. 문제가 생겨도 별로 걱정 않는다. 그 순간만 잘 눙치면 문제가 곧 잊혀 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난 수십년간 눈부신 발전을 해 왔다. 그러나 정치인을 뽑는 일에 이성과 감성을 균형있게 사용하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오히려 퇴화해 온 느낌이다. 흔히들 “한국 국민은 일류, 기업은 이류, 정치는 삼류”라고 한다. 하지만 삼류 정치가 계속되다 보면 국민들의 급도 떨어지게 돼 있다.
국민들이 일류 소리를 계속 들으려면 정치의 수준을 높여가야 한다. 감성의 범람을 이성의 둑방으로 막아내지 않고서는 그것을 기대하기 힘들다. 가령 정치인들이 “우리가 남이가”라고 또 다시 주술을 읊어대기 시작하면 이렇게 퉁박을 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 싶다. “그래. 우리는 남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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