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튼, 세스, 미라, 엘리너. 이번 주 내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아이들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찍은 듯한 가족사진 속에서 백인 양부모 옆에 선 아이들은 그 또래답게 맑고, 수줍은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미혼모의 아기로 태어나 아동복지시설에 맡겨졌다가 미국인 부모에게 입양되어 10년, 8년, 5년, 3년을 살았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지난 24일 모두 하늘나라로 갔다.
아이오와 시티에서 일어난 일가족 동반자살 사건의 희생자들이다.
보통 ‘남의 일’로 스쳐지나가는 미국중부 백인 가정의 일이 이번 주 많은 한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우리 모두 죽은 아이들과 동족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친부모한테 버림받고 미국에 와서 채 자라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아이들이 너무 가엾다.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양아버지 스티븐 수펠 씨는 버림받은 한국아이들을 거둬준 고마운 사람이었는데 그 선한 인연을 죽고 죽이는 악연으로 끝내고 말았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 새삼 불가사이하게 느껴진다.
인연을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아무 것도 우연이 아니다. 길가다가 옷깃만 스쳐도 500겁의 인연이라고 한다. 1겁이란 거대한 바위를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번씩 닦아 바위가 완전히 닳아 없어져도 다 하지 못한다는 시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말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500번 지나야 한번 만나는 것이 길가다 옷깃 스치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같은 직장에 다니는 모든 일들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한 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1천겁, 한 민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4천겁, 한 동네에 태어나는 것은 5천겁, 부부는 7천겁, 부모와 자식은 8천겁의 인연이라고 불경은 말한다.
세상의 삶이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관계를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 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인연들을 잘 가꾸어 나간다는 말과 통한다. 인연에 대한 성실함은 기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얼마 전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오래된 사진이 발견돼 화제가 되었다. 1887년 설리번이 헬렌의 가정교사로 들어간 다음해에 찍은 것이니 120년이 된 사진이다. 당시 8살의 앤이 의자에 앉아 인형을 오른 손으로 잡고 있고, 그 옆에서 설리번이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다.
헬렌 켈러가 시각, 청각의 장애를 극복하고 강연과 저술활동을 하며 훌륭한 삶을 살아낸 ‘기적’ 뒤에 설리번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해 야생동물처럼 마구 날뛰던 어린 헬렌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평생을 옆에서 수발들어준 사람이 설리번이었다.
설리번이 스승과 제자로 맺어진 인연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어준 덕분에 헬렌 켈러라는 인물이 만들어 졌다.
한국에서 거벽 등반가로 유명한 산악인 박정헌 씨의 ‘끈’이라는 책을 보면 ‘끈’의 의미가 새롭다. 책은 지난 2005년 1월 박씨가 후배 최강식씨와 히말라야의 촐라체 북벽을 등반 중 거의 죽다 살아난 경험을 담고 있다. 악천후 속에서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길에 최씨가 빙하의 크레바스 속 수십미터 아래로 떨어지면서 생긴 일이다.
자일의 양끝에 묶인 두 사람 앞에는 세가지 길이 있었다. 박씨가 최씨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면 둘 다 크레바스로 떨어져서 죽는 것이고, 최씨를 기어이 끌어 올리면 둘 다 사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박씨가 자일을 끊고 혼자 사는 것.
대롱대롱 매달린 후배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지는 중상을 입으면서 박씨는 한순간 자일을 끊고 싶은 유혹이 스치더라고 했다.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 끝에 두 사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책에서 박씨는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끈이 있다. 그 끈이 우리를 살게 한다”
산에서 뿐 아니라 삶에서도 사람 사이에는 끈이 있다. 인연의 끈이다. 그 끈이 때로는 우리를 살리고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게 하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끈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것이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비결이 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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