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딸아이가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가 분홍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언덕에 역시 그 아이가 심은 사과나무에서도 흰빛 사과 꽃이 피고 있다. 나는 피로할 때면 화원이나 식물원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 때가 있었다. 직장생활과 집안일에 치여서 주말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랑 샤핑몰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군것질하고, 옷이나 신발이라도 살 수 있을까, 하고 주말을 기다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웬 종일 사람들로부터 상담을 받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을 해온 나는 주말이면 사람들 많은 곳에 가기가 싫었다. 특히 시끄러운 곳은 더 싫었다.
내가 즐겨 찾는 곳은 화원이나 식물원이었다. 가지각색의 꽃모종이나 어린 채소 모종이 조그만 트레이에 담겨 줄줄이 서 있는 모습들이 너무도 귀여웠다. 일주일 동안 팔려가지 못하면 다음 주말에는 많이 자라서 제법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그런 어린 것들을 사와서 뒤뜰에 심어놓고 매일 들여다보고 좋아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바로 뒤뜰로 나가 물을 주고 그들과 시간을 조금이라도 함께 하는 즐거움을 가졌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채소밭을 가꾸면서 식물들과 대화를 한다고 황태자의 정신 상태를 의심한다는 식으로 쓴 기사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다. 정말 모르는 소리다. 식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느냐가 이슈가 아니라, 자기가 가꾸는 식물에게 말을 함으로써 휴식과 위안을 받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매일 좋은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화분의 꽃이 빨리 피고 식물이 더 건강하게 자라더라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여하튼 나는 화원과 식물원의 통로를 천천히 돌면서 여러 종류의 식물들과 친해졌다. 처음에는 지루해 하던 딸아이도 차츰 흥미를 붙여 식물 이름들을 외우기 시작했고, 이 꽃을 집으로 데려가자, 저 식물을 사자고 조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데려온 것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는 복숭아나무와 사과나무다.
그때 열 살이 조금 넘은 딸아이는, 두 오빠들이 어이없다는 듯이, 흥미 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앞에서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촐랑대며, 조그만 나무가 들어갈 만큼 땅에 구덩이를 파고 복숭아나무를 내려 앉혔다. 딸아이가 골라 와서, 딸아이가 심은, 딸아이의 복숭아나무는, 그러나, 아주 천천히 자라서 꽃이 피는데 수년이 걸렸고, 열매는 아직까지 한 번도 수확을 못해 봤다.
자기 나무라고 처음 열심히 챙기던 딸아이는 틴에이저가 되면서 새로운 흥미를 개발하게 되었고 나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비탈에 어색하게 심은 사과나무는 놀랍게도 매년 열매를 맺어 왔는데, 한 해는 아주 큰 사과를, 다음 해에는 모양새 없는 과일을 생산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 사과는 아무도 따먹지 않고, 새들의 밥이 되거나 가끔 정원사가 따 가기도 한다. 딸아이와 통화할 때, 너의 사과나무가 꽃을 피웠다고 알려주어도, 하우 나이스 라고 짧은 반응을 보일 뿐이다. 아직도 눈이 내리는 곳에서 살고 있는 그 아이에게는 데드라인이 임박한 대형 프로젝트가 관심사이지 부모 집 뒤뜰에서 봄 소식을 전하는 과일나무들은 뉴스 아이템이 못되는 것 같다.
뒤뜰에는 자몽나무와 오렌지나무도 있지만 꽃향기만 즐기고 과일은 시장에서 사서 먹는다. 이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과일나무들을 다시 전정하고 사랑을 주어야겠다.
햇볕이 아주 부드러운 뒤뜰에 앉아 늦은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봄을 즐긴다. 푸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소나무 한 그루, 언덕에 위상 좋게 자리 잡은 우람한 유클립투스, 두 그루의 팜트리, 몇 가지의 과일나무들, 언덕을 꽉 채워 덮은 로즈메리, 영산홍 빛깔의 꽃이 피기 시작하는 부간빌야, 사슴이 뜯어먹어서 자라지 못하는 장미 몇 그루, 꽃가루를 날리고 있는 제이드 트리 관목들, 지붕과 키가 맞먹는 고사리 나무, 크고 무거운 토기 화분에 심은 관상용 식물들. 이들을 보면서 흘러간 세월을 꼽아본다. 우리가 심은 것도 있고 집이 생기기 이전부터 자라온 것들도 있다.
한국에 갔을 때 시골 어머니 집에 피어 있는 봉선화와 코스모스 씨를 받아 왔었는데 잊고 있다가 최근에 찾았다. 이 씨속에 아직도 생명이 살아 있다면 정말 좋겠다. 정원사에게 좋은 흙을 갖고 오라고 부탁해 놓았다. 다음 주에 이 꽃씨들을 뿌릴 예정이다
송정원
전베벌리힐즈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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