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쓴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원래 제목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이다. 학식 깊고 인품 고매한 지킬 박사와 흉측하고 난폭한 하이드가 사실은 동일인물인 이상한 케이스, 그래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을 다룬 작품이다.
작품에서 지킬 박사는 특수한 약을 먹고 변신해 선한 지킬과 악한 하이드의 두 사람으로 번갈아 가며 살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두 자아였을 것이다. 선한 자아와 악한 자아이다. 마음속에 선과 악, 빛과 어둠 … 대립된 심리가 공존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나’와 뒤로 숨긴 ‘나’가 다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비슷한 인간의 잠재적 모습이다.
뉴욕의 존경받던 정치인이 치욕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엘리엇 스피처 주지사라는 ‘지킬 박사’가 매춘조직의 ‘9번 고객’이라는 ‘하이드’로 들통이 나면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
스피처는 ‘정의’를 무기로 오늘의 지위를 얻은 인물이다. 뉴욕 주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정과 비리는 무늬도 용서하지 않겠다며 부패척결의 철퇴를 휘둘러서 한편으로는 적을 키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인기를 키웠다.
그랬던 그가 고급 매춘조직의 단골 고객으로 드러나면서 뉴욕뿐 아니라 전국이 시끌시끌하다. ‘스피처 주지사와 9번 고객의 이상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스피처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부동산 부호의 아들로 재력 탄탄하고, 하버드 법대를 나올 만큼 머리 뛰어나며, 장차 민주당 대선후보감으로 주목 받을 만큼 성공한 인물이다. 하버드 동창인 아내와 예쁜 세 딸이 있는 가정도 단란해 보인다.
재력, 실력, 권력, 가정의 행복까지 다 갖춘 그가 어떤 결핍감 때문에 콜걸에게로 달려가곤 했는지, 똑똑한 그가 위험부담 큰 그런 일에서 왜 헤어나지를 못했는지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권력 가진 자들의 오만, 일부일처제로 억압당하는 성욕의 발로… 전문가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하지만 한 인간이 비이성적 행동으로 빠져드는 가장 근본적 원인은 ‘약함’이라는 생각이다. 이성으로는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같은 상황에 빠져들곤 하는 인간의 약함이다. 심한 경우 강박 충동으로 분류된다. 평소에는 분별 있는 사람이 심리적 압박감이 심해지면 어떤 충동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경우이다. 마약, 알콜, 도박, 섹스 등이 그 대상이다.
결과적으로 스피처 주지사는 크리스틴이라는 22살짜리 콜걸을 만난 죄로 48년간 승승장구하던 성공가도에서 한순간에 곤두박질쳤다. 아내와 어린 딸들에게 얼굴을 들 수없는 수치심이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치욕과 절망의 날들이 그를 맞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가 전에도 있었다. 1963년 영국에서도 48세의 잘 나가던 정치인이 크리스틴이라는 갓 스물 넘은 콜걸 때문에 공직을 떠났다. ‘프로퓨모 사건’이다.
보수당 맥밀란 내각의 국방장관이던 존 프로퓨모는 차기 총리로 거론될 만큼 촉망받는 정치인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2차 대전 중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준수한 외모에 뛰어난 화술, 게다가 미모의 영화배우를 아내로 맞고 있었다.
그런 그가 크리스틴 킬러라는 고급 창녀를 만나면서 인생이 꼬였다. 크리스틴의 또 다른 애인인 주영 소련대사관 주재 해군무관이 스파이로 의심되면서 스캔들이 정치 이슈화하자 그는 더 이상 공직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20세기 영국 최대의 섹스스캔들로 꼽히는 ‘프로퓨모 사건’은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반부가 끝났을 뿐이다. 후반부의 내용은 2년 전 3월 그가 사망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정계은퇴 후 프로퓨모는 런던 빈민가의 한 자선기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바닥 닦고 변기 청소하고 설거지하며 알콜 중독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몇 년 후부터 그 기관의 기금모금을 주관하면서 평생을 봉사활동에 바쳤다. 속죄의 헌신이었다.
삶의 여정에서 치욕의 나락에 빠질 위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 같은 실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더 의미 있는 삶으로 여생을 채워나갈 수가 있다. 프로퓨모가 좋은 본보기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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