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욱(목회학박사)
‘설국(雪國)’을 써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노인과 바다’를 쓴 미국의 유명작가이자 그 또한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자살로 추정되는 엽총 사고로 사망했다. 왜 그토록 유명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이들이 삶을 끝까지 아름답게 지켜가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까.
굼벵이도 꿈틀하며 끝까지 살아남으려 애쓴다. 이런 생명체에 비해 인간의 목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귀중한 존재다.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엔 있다. 그들은 어찌하여 우주보다 더 귀한 생명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려 할까. 허무주의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세상과 생명을 헐값으로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명경외(生命敬畏). 의사인 알버트 슈바이처박사는 독일에서의 호화스런 생활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평생을 그 곳 원주민들을 위해 살았다. 그는 하늘이 이 땅에 베푼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긴 사람 중의 하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약도 써보지 못하고 열병이나 전염병에 걸려 힘없이 죽어가는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평생을 헌신했다. 인도의 수녀 마더 테레사. 빈민굴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는 빈민가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등 죽을 때까지 빈민들의 어머니가 되어 그들을 보살폈다. 하와이 나환자촌의 데미안 신부. 문둥병 걸린 사람들과 함께 자고 먹으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다 그 또한 문둥병으로 죽어 갔다. 가와바다, 헤밍웨이, 슈바이처, 테레사, 데미안.
똑같이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앞의 두 사람은 세상이 모두 부러워하는 노벨문학상까지 받고도 무엇이 부족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뒤의 세 사람은 분초도 아끼지 않고 평생을 힘없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그들은 하늘이 부르는 그 시각까지 생명을 초개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바치며 헌신하다 죽었다. 같은 죽음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수 있음에야.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백지의 상태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들 삶의 과정은 모두가 틀리다. 틀리게 되는 원인은 환경에 의할 수도 있지만 세상과 생명에 대해 보는 관점이 허무주의, 염세주의. 부정주의로 빠지며 변할 때 그들의 삶은 종래 가와바다와 헤밍웨이처럼 자살로 생이 마감될 수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제한받는 동물이다. 살아가며 사회성이 결여될 때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혹은 자신이 소외됐다고 스스로 착각하게 된다. 곧 왕따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 혹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을 동반한 범죄들은 자신이 소외당했다고 생각하여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즉 소외가 우울증으로 변해 증오의 허무와 염세주의로 빠질 때 위험은 발생한다.
그들에겐 세상이 모두 적이 된다. 자신을 구제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 자포자기하고 생명을 무시하게 된다. 이럴 때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외를 이기게 해 줄 수 있는 관계 개선이다. 또 낙천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과 생명경외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다.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본인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줄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관점과 시선은 자신이 어떤 안경을 끼고 보느냐 에 달려 있다. 빨간 안경을 쓰면 모두가 다 빨갛게 보인다. 항상 맑은 날은 없다.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도 분다. 그리곤 따뜻한 태양이 비친다. 평생 비단같이 순탄한 길만 펼쳐져 있는 사람은 없다. 굴곡이 있고 상대적이며 다양한 게 세상이다.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약하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늙으면 간다. 하늘이 세상에 내린 자연법칙이다. 사람은 200년 300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한 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500년 1000년도 살 수 있다. 그 생의 의미 부여에 달려 있다. 잘된 삶과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와 답이다. 설령 어제까지의 세상과 자신에 관해 보는 눈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오늘부터 바꾸려 노력하면 된다. 잘못됐다 함은 세상과 자신과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다. 세상과 자신이 나쁘다, 안 좋다 라 하는 생각 보다는 잘 될 것이다 라 하는 희망을 가져야 길은 열린다. 노벨상을 받아 명성을 떨쳤다 해도 자기 생(生) 하나 감사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가와바다와 헤밍웨이. 이유야 있겠지. 원주민과 빈곤자와 버림받은 문둥병자를 위해 생을 헌신하며 마감한 슈바이처, 테레사, 데미안.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이런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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