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지난 26일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은 60여년간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과 북한이 음악을 통해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미국의 악단이 북한의 국가를 연주하고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수라고 하던 미 제국주의의 성조기와 국가 연주가 북한 전역에 중계방송된 이 공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공연장 밖의 북한은 살벌하고 비참한 세상이었지만 공연장 안의 분위기만은 세계 어느 곳이나 다름없이 감동적인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쥐구멍의 햇볕처럼 북한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번 뉴욕 필의 평양 공연이 북한의 대외개방 메시지를 담고 있고 이로 인해 북미관계의 전망이 밝아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 동서 냉전시대에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던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이 음악외교로 물꼬를 텄던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냉전이 한창이었던 1956년에 보스턴심포니, 1959년에 뉴욕필하모닉이 소련에서 공연하였고 미국의 유명 재즈스타들이 잇달아 모스크바에서 공연했다. 또 미소 대립이 심각했던 레이건대통령 시절에도 미국의 국립교향악단이 모스크바에서 공연하는 등 음악외교가 정치적 극한대립의 완충역할을 했다. 또 1973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중국 공연은 중미 수교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러므
로 북한이 뉴욕 필의 공연을 요청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이 긍정적 신호이기는 하지만 북미관계의 진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일부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과 문화교류를 함으로써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문화교류가 앞으로 확대될 전망이지만 문화교류가 다른 현안문제의 개선으로 이어지기보다는 북한이 핵문제나 인권문제 등을 피해가면서 미국과 수교를 달성하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 전략에 말려들지 않을 경우, 북미관계는 쉽게 진전하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북한의 개방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바로 남한 때문인 것 같다. 평양에서 뉴욕 필이 공연한 바로 그 날, 남북간에는 2010년 월드컵대회를 위한 평양 예선 실무회담이 열렸다. 남북한이 대결하는 이 예선전에서 북한은 남한팀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사용할 수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공화국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반도기와 아리랑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미 한국내에서 열린 남북한 경기에서 4번이나 인공기와 북한국가를 사용했는데 북한에서 태극기와 애국가를 못 쓰게 하는 것은 남한에게는 개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이니 강성대국이니 하면서 한민족의 정통국가로 자부심을 고취하고 있지만 실제 국력은 남한에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열세이다. 남북한의 국력을 대충 비교한다면 남한이 북한의 인구보다 두 배 이상이며 개인소득은 10배 이상, 국가 경제력은 25배 이상으로 남한은 세계 상위권 국가이며 북한은 세계 하위권 국가에 속한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이 남한에 개방된다면 북한의 붕괴는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북한체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미국의 무력이 아니라 남한에 대한 개방이라는 것을 북한지도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에 대해 체제보장 운운하는 것은 협상 전략을 위한 이슈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북한도 이제는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방을 하면 국민들의 의식이 변하게 되고 특히 남한과 비교하게 되면 체제 유지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렘마에 빠져 있다. 그래서 중국식 개방도 생각해 보았고 작년에는 베트남식 개방을 연구했다. 이번 뉴욕 필의 평양 초청도 북한으로서는 개방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탐색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앞으로도 미국과 문화교류를 더욱 확대하고 다른 유럽국가들과도 유사한 교류를 시도할 것이다.
북한이 한국에 직접 개방하지 않고 서방세계와 교류를 모색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개방되는 것은 북한에는 물론 한국에도 좋은 일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통해서 북한의 개방에 참여할 수 있고 또 북한이 고립에서 벗어나면 한국과 경제적, 문화적 이질감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개방되어야 한다.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이 이 개방의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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