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여느 때처럼 할인매장에서 주말 과제인 장을 보고 있었다. 먹거리와 생필품들을 이것저것 가득 골라 담고 큰일을 마무리하는 뿌듯한 마음으로 계산대에서 현금카드를 꺼내들었다. 헌데 그 순간 너무 당황스런 일이 벌어졌다.
“어머나! 번호가 뭐더라?”
오로지 믿을 것은 현금카드뿐인 상황에서 비밀번호가 완전 깜깜인 것이었다. 급하게 새로 만든 카드인데 아주 쉬운 숫자조합이라 당연히 기억할 것으로 여기고 방심했던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쉽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찬찬히 더듬어 번호를 겨우 추측해낼 수 있었고 다행히 자칫 복잡해졌을 여러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문제의 새 현금카드를 발급하게 된 발단 역시 아주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다름 아닌 연방국세청(IRS)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이 나라의 권위적인 기관이기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아서 인지, 자발적으로 그것도 아주 인심 좋게, 개인 신상정보 및 소셜시큐리티 번호, 은행정보, 심지어는 현금카드의 비밀번호까지 고스란히 바치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첫번째 전자메일은 지난해년 여름쯤이었지 싶고 얼마 전 그 세번째 메일을 받았다. 내용인즉 국세청에서 나한테 줄 돈이 있으니 필요한 정보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미심쩍어 미적거렸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웬일인지 믿고 싶어졌나 보다.
올해 세금보고를 하기 전에 묵은 것은 빨리 청산하자 싶었고 더군다나 돈까지 생긴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 그다지 신뢰하지 않던 학교 전자메일 시스템도 그날따라 무슨 조화인지 웬만한 스팸메일은 모두 걸러내는 믿을 만한 시스템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는 ‘답장’ 키를 눌렀다. 그리고선 요구하는 대로 온갖 정보를 착실하게 입력했다. 현금카드의 비밀번호를 묻는 순간 조금은 이상하기도 했지만 일단 믿기로 한 마음은 쉬이 동요하지를 않았다. 그저 ‘와! 일주일쯤 후면 공돈 같은 돈이 좀 생기겠네. 뭘 함 좋을까?’ 궁리하며 마냥 즐겁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즐거움도 잠시 잠깐, 하루인지 이틀 후인지 기억은 없지만 학교 시스템 메일에 요즈음 IRS를 사칭하는 전자메일이 돌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떴다. 여기저기 뉴스를 찾아보니 벌써 지난해 봄부터 나돈 얘기였다.
아차 싶어 허겁지겁 온라인으로 은행구좌를 체크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별 사고가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단숨에 은행으로 달려가 새 구좌를 개설하고 새 체크 북, 새 현금카드도 만드는 수선을 떨게 된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빚어낸 나의 어리석음과 그로 인한 번잡함 그리고 앞으로 무슨 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등 내 신세 한탄을 한참동안 듣고 있던 친구가 갑자기 숭례문 얘기를 꺼냈다. 엄청난 소를 잃고 남은 외양간마저도 제대로 고쳐낼지 모르는 숭례문 사건을 생각하며 그나마 나는 소를 잃지 않고서도 외양간을 단단히 했으니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 친구 머릿속에도 숭례문 생각이 맴돌고 있어 어리석은 소 외양간과 관련되는 일에는 곧 바로 연상이 되는 것 같았다.
대화 내용이 숭례문으로 옮겨지자 나는 위로가 되기는커녕 더욱 더 화가 나고 속이 터질 지경이 되었다. 세상에 전시도 아닌데 한 나라의 국보 1호가 홀라당 타버렸다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설날 떡국 잘 먹고 돌아서서 들어야 하는 뉴스 치고는 해도 너무한 뉴스다. 그 나라 문화유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국보 1호의 경비 비용이 겨우 아담한 가정집 수준이었고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들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는 데는 정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화재 발생 후 우왕좌왕 하던 끝에 숭례문이 무너지는 모습에 국민 모두의 가슴도 같이 무너졌으리라.
오죽했으면 ‘숭례문이 분신자살했다’고들 한단다. 깊게 반성하며 사려 깊게 따져봐야 할 일이지 싶다. 그래서 또 다시 소중한 문화재산들이 속이 터져 자폭하려 들기 전에 그 사정을 잘 헤아려서 달래고 보호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선조님들한테 자손들한테 그나마 덜 부끄럽지 않을까, 그저 멀리서 안타까울 뿐이다.
내 사건도 숭례문 화재도, 고친 외양간이 정말 튼튼했으면 그리고 앞으로는 어리석음에 놀아나지 않고 그 외양간을 잘 유지했으면 바라고 믿어보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김선윤/USC 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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