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 달을 써버리고 또 이렇게 이월을 맞았다. 특별한 바람도 다짐도 없이 덤덤하게 새해를 맞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축복 받는 땅이 되길 빌었다.
내가 바라던 대로 정초부터 단비가 내려 자장가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푹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온 산장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조물주께서 게으른 나에게 하얀 도화지를 내미시며 뭔가 새 계획을 그려보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새삼 유난 떨 만한 재능도 없고 내 깜냥에 더 바라거니 욕심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운 시험지를 받은 아이처럼 눈 덮인 산장을 망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난데없이 초등학교 때 군가 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예선 때 좋은 성적을 내고도 너무 연습을 많이 해서 목이 쉬어 본선에 참가하지 못했던 일, 중학교 이 학년 일 학기 때 제법 성적이 좋았는데 좀 더 욕심을 내느라고 마지막 학기시험 때 밤샘을 하고 지각을 해서 평소실력만도 못한 점수를 받은 일이 생각났다.
그뿐 아니라 내가 긴장해서 오히려 실수연발을 했던 경험으로 나는 뭐든지 평소 실력으로 늘 하던 대로 개성 없이 생긴 외모 그대로 편하게 사는 방법을 습득했다.
자연스러움이 가장 멋있다 라며 첫 선을 볼 때도 특별히 외모를 꾸미거나 내숭도 떨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식 때 더 예쁘게 보이려고 전문가가 해준 신부화장으로 신부 입장을 하려는데 신랑이 사람 버려놓았다며 화장을 지우라고 해서 예식이 지연될 뻔 한 일도 있었다. 나는 정말 특별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솔직히 새해라고 특별 청소나 책상서랍 정리는 해 볼 마음이었는데 미리 몸살이 났다.
이렇게 쉬 허물어질 계획을 거듭하다가 자신에게 믿음이 없어져 그 초라한 경험들이 종내 노력의 저력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늘 그 날이 그 날 같은 신년을 갈등하며 보내던 중 이곳 우리 문인 모두의 스승이었던 고원 교수님께서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어이 듣지 말아야 할 부고를 들었다.
그때부터 몇몇일 눈물같은 비가 내렸고 그 비가 또 눈이 되었다. 교수님께 보내야 했던 마감날짜가 지난 원고봉투가 지금도 내 책상 위에 있다. 이제 그 봉투를 보낼 주소가 이 땅에는 없다. 장례일정을 마칠 때까지 무던히 태연한 척 참으시던 미망인이 “그 산장에 눈 오는 날 꼭 가시려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두 번째 내린 눈은 회색 눈발같이 슬프기만 했다.
이 사업을 하면서 계획성 있는 미국인들과 타민족의 생활에 감탄할 때가 많다. 지난 연말 콜로라도에서 25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와서 일주일 동안 우리 캐빈에서 묵었다. 그들은 할아버지로부터 삼대가 모두 교사였다. 이들은 우리 산장에 짐을 풀고 밴을 빌려 LA 근교를 관광하고 섣달 그믐밤에는 모두 모여 그간의 회포를 풀고 새해 첫날 새벽에 로즈 퍼레이드를 관람하러 갔는데, 퍼레이드 관람 예약 장소인 패사디나 모 한인교회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편하게 아침식사도 잘 대접받았다며 한인들과 좋은 인연을 맺은 해라며 좋아했다. 그들이 타민족들에게 한인 칭찬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사무실에서 예약 전화를 받는 것이 나의 일이다. 벌써 고객들과 여름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장점을 배워서 매일 계획을 세워 규모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데도 나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들의 인생여정이 목표대로, 아니 매일 작게 크게 세운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마음의 경영이 사람에게 있지만 그 말의 응답을 하시는 그 분께 맡겨야 하고,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가 계신다”(구약성서 잠언 16장)는 것을.
우리가 할 일은 매일 시간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 할 따름이다. 오늘 나는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또 의지하며 살 것이라고 하얀 눈 위에 쓴다. 매일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앞날 나의 산장일기의 기상도는 그 분께서 주관하실 것이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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