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고 했던가. 아이오와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솟던 민주당 흑인 대선주자 버락 오바마가 뉴햄프셔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걸려 넘어졌다. 8일 기록적인 유권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당초 낙승이 예상됐던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배, 민주당 경선구도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빠졌다.
이번 뉴햄프셔 프라이머리는 ‘바람’과 ‘조직’의 대결이었다. 오바마는 아이오와에서 일으키기 시작한 바람을 허리케인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여론조사에서 두 자릿수로 앞서는 등 유권자들도 이에 호응하는 듯 보였다.
반면 힐러리는 바람 차단을 위해 프라이머리 직전까지 뉴햄프셔를 누비며 발이 부르트도록 뛰었다. 특히 7일 유권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캠페인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살짝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눈물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나오게 한 결집효과는 상당했던 것 같다.
그 결과 힐러리는 여론조사의 예상을 뒤집고 뉴햄프셔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투표 후 나온 출구조사 분석에서 민주당원들의 60%가 힐러리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나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계층 사이에서는 ‘클린턴’이란 이름이 여전히 만만치 않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번 대선 레이스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민주당 오바마와 힐러리의 대결이다. 오바마는 변화를 캠페인 이슈로 선점해 한때 상당히 뒤쳐졌던 열세를 극복하고 힐러리와 맞수의 위치까지 치고 올라왔다. 오는 2월5일 ‘수퍼 화요일’까지 잇달아 치러지게 될 예비선거에 이번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결과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관심사이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2008년 대선은 ‘클린턴 대세론’이 지배했다. 민주당 경선에서의 승리는 물론 본선에서도 공화 후보를 누르고 힐러리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분석과 전망이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풍향이 바뀌어 버렸다. 아이오와에서 오바마에게 일격을 당하고 뉴햄프셔에서는 진땀 승을 거두는 등, 여유 있게 결승점까지 가겠다던 당초 계획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대세론에 안주한 탓이었다.
부시의 실정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내재된 요구와 욕구가 무엇인지는 사실 자명했다. 미국인들의 70%가 “미국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응답했을 때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였다. 이런 욕구를 재빨리 읽은 후보가 오바마였다. 그는 이 메시지를 선점했다.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업이 시장을 지배할 확률이 높듯이 선거에서도 이슈를 선점한 후보가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한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갈망하는 경제회생 이슈를 선점해, 도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압승을 거둔 이명박 당선자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힐러리 진영은 그동안 이런 욕구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경험’과 ‘경륜’이라는 자산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다 아이오와에서 오바마에게 일격을 당하자 부랴부랴 캠페인 전략을 ‘젊음’과 ‘변화’로 수정했다.
다른 후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변화를 외쳤다. 지난 주말 열렸던 ABC 방송 토론회에서 양당 후보들은 ‘변화’라는 단어만 무려 90번을 입에 올렸다. 힐러리가 뉴햄프셔에서 거둔 승리가 이런 전략변화의 성과물인지 속단하기는 힘들지만 일단은 한숨을 돌리게 됐다.
그러나 힐러리에게는 여전히 숙제가 남아 있다. 남편 집권 8년과 2선의 연방 상원의원이라는 배경이 주는 ‘기득권층’의 이미지를 어떻게 탈색해 가느냐 하는 것이다. ‘변화’라는 메시지와 자신의 이미지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조화시켜 나가느냐가 앞으로 한 달간 힐러리의 정치적 운명을 가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에게도 숙제가 있다. 그가 선점한 변화의 화두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방법을 유권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칫 ‘공허한 수사’라는 이미지만 줄 경우 그가 힘들게 일으켰던 돌풍은 말 그대로 ‘한때의 지나간 바람’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해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은 흑인 유권자들의 표심이다. 흑인들은 힐러리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었다.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는 “흑인 대통령 탄생은 시기상조”라는, 비관적 현실 인식 혹은 학습화된 무기력감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바마가 백인 일색인 아이오와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무기력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징후를 보이고 있다.
민주당 경선 결과에 흑인표의 향배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곧 실시될 흑인 많은 작은 주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에 모두가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