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서울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답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 넌센스 퀴즈이긴 하지만 과학적 타당성이 있는 답변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아름다운 여자와는 두 시간을 같이 앉아 있어도 2분처럼 느껴지고 뜨거운 화덕 위에는 2분만 앉아 있어도 두 시간처럼 느껴진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상대성’이었다.
시간은 보편성을 가지고 항상 매끄럽게만 흐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기초는 이처럼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다. 당신은 올 한해를 어떤 속도감으로 보냈는가. 인생의 잔인한 아이러니의 하나는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할 때는 늑장을 피우는 것 같고 잡아 두고 싶을 때는 훌쩍 떠나 버린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의 기간을 아주 짧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좋은 경험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대뇌피질 속에서 적은 공간을 차지하고 그 결과 시간이 적게 걸린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아쉬울 만큼 빠른 속도로 한해가 지났다면 그만큼 성취감이 넘쳤던 한해였을 터이고 너무나 더디게 지났다면 그만큼 좌절과 고통이 시간의 흐름을 발목 잡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상대성’이야 어찌됐던 우리 모두에게는 올 한해 1년·12개월·52주·365일·8,760시간·525,600분· 3,153만6,000초의 시간이 주어졌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다만 주어진 시간을 잘 쓴 사람이 있고 못 쓴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07년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의 ‘자기기인’(自欺欺人)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됐을 만큼 거짓이 지배했던 한해였다.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는 사실만이 진실이었던 한해처럼 느껴진다. ‘거짓의 현란한 춤판’ 속에서도 시간은 또 다시 한 매듭의 피니시 라인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한손으로 꼽을 만큼의 날수가 남았을 뿐이다.
고려시대 어떤 선사가 노래했듯 가는 해와 오는 해의 하늘이 다르지 않을진대도 우리는 매년 이맘때면 망년이다 뭐다해서 호들갑이다. 기업들은 일년 장사를 수치로 결산하고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언론들도 한해를 결산하는 다양한 특집을 통해 지난 1년의 사회상을 총 정리한다. 교회를 비롯한 종교·사회 조직들도 마찬가지다. 하루와 한달은 무덤덤하게 보내면서도 한해를 보낼 때는 왜 유난들을 떠는 것일까.
시간을 분절해 우리에게 숫자로 알려주는 ‘캘린더’는 원래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던 단어이다. 로마시대에 금전의 대차관계를 매달 마지막 날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때 사용하던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뜻하는 캘린더로 전용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1년의 마지막 캘린더를 뜯으며 한해를 결산한다는 것은 본래의 어의에 딱 들어맞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결산의 풍속은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섣달그믐날 ‘빚 갚기’가 그런 것의 하나다. 돈을 꿔준 사람들은 새해가 시작되면 정월 대보름까지는 빚 독촉을 할 수 없다는 습속이 있었다. 그래서 한해를 마무리 하는 섣달그믐날 빚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꾼 돈을 갚았다.
또 신년을 맞아 하는 세배도 있지만 한해가 가는 마지막 날 하는 ‘묵은세배’ 풍속도 있었다. 섣달그믐날에는 이웃 어른들을 찾아 지난 한해동안 베풀어 준 가르침에 감사를 표했다. 의례화된 형식적 신년세배보다 묵은세배가 오히려 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온 감사의 표현으로 보여 진다. 이곳에서 묵은세배를 한번 되살려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고.
결산의 계절을 맞아 모두가 분주한 모습들이다. 결산을 하면서 통장의 잔고와 매출장부 계산에만 그치지 말고 ‘마음의 회계장부’도 같이 펼쳐 보면 좋을 것 같다. 신세진 일을 그냥 지나친 적은 없었는지, 마음에 상처 준 사람은 없었는지 꼼꼼하게 꼽아 봤으면 한다. 그리고 부채가 드러나면 금년 남은 며칠이 지나기 전에 해결하고 가도록 하자. 마음의 부채를 해결하는 데는 아주 간단한 화폐가 필요할 뿐이다. “감사했습니다”와 “미안했습니다”라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두 마디면 된다.
캘린더가 금전출납부를 의미한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새 캘린더를 걸기 전에 묵은세배 하듯, 그리고 묵은 빚 갚듯 마음의 채무관계를 털어버리는 것이 새로운 해를 홀가분하게 맞을 수 있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새로이 길을 떠날 때는 구두에 묻은 먼지들을 깨끗하게 털어 내고 첫걸음을 내디뎌야 상큼한 기분이 되듯 말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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