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주중의 찬바람이 불고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흐린 오후의 무척 한가한 때였다. 카운터에 앉아 졸음이 가득 찬 머리로 메뚜기처럼 까닥까닥 방아를 찧고 있는데 손님이 들어왔다.
흐릿한 눈을 들어 바라보니 키가 크고 잘 생긴 중년의 백인 남자와 금발의 멋쟁이 백인 여자였다. 너무 진귀한 손님들인지라 나는 깜짝 놀라 그들을 맞이했다.
남자가 나 보고 주인이냐고 묻더니 그렇다고 하니까 다짜고짜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손을 잡았더니 오래된 은인이라도 만난 듯이 손을 붙잡고는 놓지를 않는다. 그리고는 옆에 서있는 금발의 미녀를 가리키며 약혼녀라고 소개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남자에게서 손을 빼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악수를 하더니 갑자기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어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반지를 받아 보니 큼직한 금반지인데 한 가운데 커다란 보석이 하나 박혀 있고 주위로 작은 보석들이 삥 둘러 장식되어 있는 보기에도 값비싼 반지 같았다.
아하, 약혼반지를 자랑하는가 보다 하고 반지를 빙빙 돌려가며 보고는 “정말 멋진 반지다”하면서 돌려주려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자기 손목에서 시계를 휙- 잡아 빼서는 나에게 준다. 또 얼떨결에 다른 손으로 그것도 받아들었다. 금시계였다. 멋있다고 한 다음 돌려주려고 했더니 둘 다 손을 가로로 흔든다. 내가 조금 황당해져서 더 앞으로 내밀며 받으라고 하니까 백인 여자가 웃으며 나보고 가지라고 한다.
순간 나는 혹시 커플 산타? 그래도 내가 조금 많이 더 황당해져서 아니 내가 왜 이걸 받아? 자, 자. 하며 돌려주려고 하자 남자 산타가 아주 정중하고 묵직하게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말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네. 당장 돈이 필요한데 이 반지와 시계를 받고 100달러만 빌려주면 2시간 내로 달려와 갚겠네. 부처같이 생기신이여”하면서 두 손을 합장하며 허리를 90도로 구부린다.
고깃간에 있던 종업원들과 야채를 다듬던 종업원이 모두 몰려 와서는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다. 내가 미소를 듬뿍 담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또 다시 물건을 내미니까 정 그러면 60달러만 빌려주면 택시타고 벼락 치듯 다녀오겠다고 한다. 60달러라. 사기를 당한다 해도 이 물건을 되팔면 그 정도는 나올 것 같았다.
시계와 반지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진짜임에 틀림없는데 내가 너무 야박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오죽이나 돈이 급했으면 모르는 마켓 안으로 불쑥 들어와 약혼반지와 시계를 맡기고서라도 돈을 빌리려 하나 싶어 물건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돈이라고 생각되는 60달러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올 때까지 물건을 보관해 두기로 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싶어 지하 금고에 깊숙이 넣어둔 금반지와 금시계. 매일 마켓만 나오면 금고문을 열어 확인하고는 안심하는 저 황금시계와 반지.
하루는 이따금씩 마켓에 오는 금쟁이(그는 다운타운의 한인 금세공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가 왔기에 그를 불러 물건을 보여주었다. 로니가 물건을 받아보더니 한 마디로 가짜라고 한다. 두 개 다 합쳐야 5달러도 안된다고 한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더니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집으로 달려가 작은 병을 들고 왔다. 그 약물 속에다 금반지와 금시계를 집어넣으니까 금은 다 없어지고 구리도 아닌 시커먼 고철이 드러났다.
마켓 종업원들은 나보고 부처 소리에 녹았다고 한다. 생각해 보건데 결코 그건 아니다.
어쩌면 몇 년 만에 마켓을 찾아온 진짜 백인, 이 동네에서 처음 본 진짜 백인이라는 내 자신의 선입관과 12월의 공짜선물을 기대하던 내가 내 자신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 물건을 카운터 앞에 걸어놓고 12월에 또 있을지도 모르는 사기의 경책으로 삼기로 했다.
일주일 후 또 카운터 안에서 졸음이 와 죽을 지경인데 처음 보는 멋진 백인 남자와 금발의 미녀가 마켓 안으로 들어서서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12월의 졸음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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