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하며 사는 법정스님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지난 봄 오두막 뒤꼍에 산 자두 꽃이 눈부신 장관을 이루더니, 여름철에는 그 열매가 주렁주렁 가지마다 실하게 열렸다. 이따금 폭풍우가 불어 닥칠 때면 열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찢겨 나갔다.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지닌 것이 너무 많으면 비바람이(자연의 질서가) 그 나무의 생존을 거들기 위해 가지를 쳐주는 가 싶었다.>
나무가 실해서 햇빛과 물, 양분을 왕성하게 빨아들여 꽃이 만발하면 그만큼 열매가 많은 것이 순리이고, 열매가 단시간에 너무 주렁주렁 열리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가지가 찢겨져 나가는 것 또한 순리일 것이다.
그렇게 한편으로 피워내고 한편으로 덜어내면서 나무는 몸을 키워나간다. 자연의 이치가 나무와 사람을 구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는 이민 연륜에 비해 급속한 발전을 해왔다. 특히 성장한 1.5세, 2세들이 이루는 영어권 한인사회는 법정스님의 산 자두 꽃만큼이나 눈부시다. 30대, 40대로 접어든 이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포진해서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코리안 아메리칸을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한인사회라는 나무가 너무 열매 맺기에만 조급했던 것일까? 가지 찢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BBK …’ 하면 당장 나오는 반응이 ‘지겹다’이다. “거짓투성이 사기꾼도 지겹고 의혹투성이 정치인도 지겨우니 그만 넘어가자”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 되었다.
그렇기는 해도 사건의 주인공 김경준 씨 남매가 자라난 남가주에서는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연줄 연줄로 그 가족을 아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총명하던 그들 남매가 명문대학·대학원을 차례로 나와 1.5세의 롤 모델로 각광받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그 똑똑하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사기행각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욕심이 유난했을까 아니면 어려서부터 너무 깊이 각인된 성취·쟁취 욕구가 그들을 눈먼 말처럼 내몬 것이었을까.
한국 검찰의 BBK 사건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한인사회가 술렁대던 지난 3일 워싱턴 D.C.에서는 20대의 한 한인청년이 법정에서 최고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애인을 죽이려고 폭행하고 상해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결과였다.
지난 5월말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명문 콜럼비아를 졸업하고 조지타운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뉴욕의 일류 법률회사에 취직이 된 상태였다. 1세 부모로 보면 그자체로 아메리칸 드림의 완성이었다.
단 하나 문제는 이 모두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청년은 집에서 보내주는 학비를 생활비로 쓰면서 때에 맞춰 진학하고 졸업하며 취직하는 거짓말을 꾸며 댔는데 막상 졸업식이 되자 더 이상 거짓을 끌고 나갈 수가 없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그는 애인을 죽이고 자살함으로써 거짓의 삶에서 탈출하려다 실패를 한 것이었다.
김경준 사건과 이 청년의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지만 근원을 따라가 보면 맞닿는 데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1.5세·2세들이 한인사회에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돌연변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어날 만한 일이, 터질 만한 때에 터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2세들을 위태위태하게 벼랑으로 내모는 어떤 분위기가 우리 한인사회에는 있다.
워싱턴 폭행사건을 맡은 타인종 변호사는 한국 문화권에서 자녀들이 받는 막중한 스트레스를 사건의 중요한 원인으로 변론했다. 한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장남인 그 청년은 부모의 기대에 맞게 성공해서 집안의 자랑이 되고 싶었는 데, 능력은 안 되고 부모에게 고백할 용기는 없고 하다 보니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자녀들을 우리의 조급한 성공 강박증에서 풀어줄 때가 되었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성취하고 쟁취하려는 조급증이다. 한인사회에 두루 퍼져있는 이 조급증의 바이러스 덕분에 우리는 단기간에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지만 그 과정에서 가지가 찢겨나가는 사고들이 생기고 있다. 이런 사고들이 예방접종이 되어서 더 이상은 바이러스가 대물림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가지와 열매가 균형 잡힌 탐스러운 나무를 위하여.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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