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수분이 빠져들면서 단풍이 되는 가을 잎을 본다. 봄 여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제 본연의 색깔을 가을이 되면 갈 때가 되어서인지 잎새의 색깔로 다 토해내며 발가벗고 보여주는 나뭇잎, 우리는 그 잎새를 단풍잎이라 부르면서 한 계절을 그 아름다움에 취한다. 사람의 마음도, 사람들의 사랑도 고운 색깔을 입혀 보여주면 취하면서 감동한다.
나는 가을잎새를 가리켜 힘없이 구르는 가랑잎이라고만 여겨왔는데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길에서 두 손을 쫙 펴고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것을 보고 처연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맑은 날 마른 길 위에서는 잔 바람에도 휘날려 가는 가랑잎이지만 잎새가 원하던 빗물에 젖으면 있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를 잡고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따뜻했던 계절을 두고 떠나는 것이 싫어서인가 보다. 사랑도 젖은 잎만 같아라!문명이 발달하고 삶의 여건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회에서는 옛 사람들의 사랑 같이 들러붙는 맛이 없고 손익계산 산출에 훈련이 잘 된 버릇대로 사랑에도 손익 계산을 자기도 모르게 산출하면서 적어도 손해가 없을 때 달라붙고 밑지는 듯 하면 가랑잎처럼 굴러서 멀리 떨어져 간다.
세속하게 변한 약삭빠른 사람들의 마음이 원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차없이 변하게 만드는 현대문명이 섭섭하다.혼동의 시대, 고속의 시대, 인간 가치의 상실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그리워 한다. 사랑은 인간이 찾아 나서는 본연의 고향이고 인간의 가치를 지켜주는 마지막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흔하게 읊어대는 고향도 없고, 기다림도 없다.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따스한 사람인가!
세상에는 아직도 기다려 주려는 사람이 많다. 비에 젖은 가을 잎처럼 그 자리에 달라붙어 안간힘을 써가며 기다려 주려는 사람, 그래서 시끄럽게 땅을 깎는 불도저 옆에서 사람들은 아직도 행복하고, 매연이 지천인 고속도로 옆 공원에 앉아있는 사람도 아직은 행복하다. 대권을 향한 입후보자들의 공약이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포
교가 잘 되는 현대의 종교가 인간 본연의 심성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문화만이 인간의 심성을 지키고 나아가서 사랑을 동댕이치게 된 오염된 인간의 심성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인간의 병을 아는 의사는 인간이고, 인간의 심성을 오진 없이 진단하고 치료할 줄 아는 명의가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일 뿐이다. 문화의 파멸은 인간의 존엄성의 파멸이다. 문화만이 인간의 값을 높인다. 뉴욕에는 문화행사가 많다. 미술 전시도 있고, 음악회도 있고, 문학에 관계되는 행사도 꽤 있다. 가 보면 거의 텅 빈 행사, 행사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 본연의 고향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인간 본연의 고향 찾기에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장단이 흥겨운 유행가 가수의 공연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고, 인간의 재발견이라던가 인생살이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순수문화 행사에는 좀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장단에 즉흥 박수는 즐길 줄 아나, 순수문화가 여윈 가슴 한쪽을 오려 발견해 주는 인간 가치에는 흥을 돋구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파악하는 한국의 순수문화 행사 주관 관계자들은 순수문화 행사를 유행성 순수문화 행사로 선정하기 바쁘다. 유행을 모르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되는 한국에서의 정서를 이용한 것이다.
사진작가 권오인씨가 사진을 찍고 직접 제작한 설중궁(雪中宮)이란 사진첩이 있다. 인적 없는 겨울날, 잔설 덮힌 적막한 창경궁과 종묘를 찍은 사진들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던 이조문화의 끝이 한낱 구경거리로 눈 속에 잠긴 그 때의 모습들, 그 때의 웃고 떠드는 소리는 다 어디로 갔는지 담 너머 아스팔트 길에는 그 때에 다니던 마차나 가마 대신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면서 달리고 있고 고층건물을 짓는다고 크레인이 무자비한 비명을 지르며 서 있다.
지금은 현대라는 시대이지만 고궁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화려하게 슬픈 바이얼린 소리도 좋으나 설중궁 사진과 함께 읊어대는 우리의 악기 아쟁의 소리는 그보다도 마음을 깊게 파고드는 가락이 처연해서 더 좋다.우리는 하늘의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가끔씩 하늘을 쳐다본다. 순수하게 슬픈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자진하고 싶어 푸른 하늘 복판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눈빛, 그것은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실상의 인간 본연이기에 가을비에 젖은 잎새처럼 두 손을 쫙 벌려 온몸으로 하늘에 달라붙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아, 젖은 잎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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