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 엘렌 김(42)씨·올케 김수진(32)씨
‘시’자 들어간 것은 모두 싫어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우스갯소리가 결코 우습게 들리지 않는 당신. 또 ‘때리는 며느리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밉다’거나 ‘며느리는 가을볕에 내놓고 딸은 봄볕에 내놓는다’ 말을 들으면 땅을 치며 공감하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뜨겁고 절절한 연대를 표하는 한인 여성들을 불러모으면 미드 윌셔가를 막고 집회를 열어도 그 공간이 비좁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결혼한 여성치고 며느리며 시어머니, 올케며 시누 이 두 가지 지위를 동시에 가지지 않은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달린 이들 모두 이 며느리와 올케로서 약자편에서 갖은 설움을 다 겪었다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시누가 되기도 하고 세월 흘러 시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이 복잡한 아이러니의 먹이 사슬 속에서 고부보다 더 복잡한 관계를 가진 것이 바로 시누, 올케 간. 여기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고전적 명제까지 덧붙이면 시누 올케 사이는 한판 전쟁을 방불케하는 게 하는 살벌한 네버엔딩 스토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 시누 올케 사이가 친 자매간보다 더 의좋은 여자들이 있다. 엘렌 김(42)씨와 김수진(32)씨가 바로 그 주인공. 때론 울고, 웃고, 싸우며 깊은 정 새록새록 들어 10년이 흘렀다는 이 신기한 여자들을 지난 2일 오후 부에나팍 오피스에서 만나봤다.
<최근 의기투합 생사(?)를 약속한 카드 제작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엘렌 김(왼쪽)씨와 김수진씨.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카드를 받는 이들이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친정 엄마처럼 친언니처럼 알뜰살뜰 보살펴 주니
아랫사람이 어찌 살갑게 믿고 따르지 않을 수 있나
■통 큰 시누, 귀염둥이 올케
두 여자 나이 차가 10년이란다.
워낙 엘렌씨가 동안이어서 자매 같아 보이지만 막상 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마치 친정 엄마 같다.
주로 말이 없는 엘렌씨와 달리 끊임없이 언니에게 무언가를 조잘대는 수진씨는 어찌보면 찰떡 궁합처럼 보인다.
뉴욕서 남동생 김병욱(38)씨와 결혼하겠다고 LA에 인사 왔을 때도 수더분한 인상이 맘에 들었고, 그 뒤 또 10년을 겪어보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올케가 이젠 좋은 인생의 길동무가 돼버렸단다. 게다가 얼마전 엘렌씨가 벌인 카드 비즈니스에까지 수진씨가 합류했으니 24시간을 붙어사는 셈이 돼 버렸다.
“올케가 살갑게 하죠. 나뿐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그렇고. 문제가 생겨도 맘에 담아두는 법없이 금방금방 풀어버리고, 그래서 지금까지 별 탈없이 살아온게 아닌가 싶어요.”(엘렌)
시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진씨가 손사래를 친다.
“어휴, 언니 그게 아니죠. 언니가 워낙 잘해 주니까. 친정 엄마보다 더 알뜰살뜰 챙겨주고 제가 대들고 버릇없이 굴어도 다 받아 주니까, 그러니까 제가 친언니처럼 믿고 따르는 거죠. 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웃음)”
통 큰 시누와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귀여운 귀염둥이 올케의 정겨운 대화다.
■내리 사랑, 그 끝없음
고부간이든 동서간이든 그 관계의 평안함은 결국 손윗사람 혹은 ‘시’자 붙은 ‘강자’의 처신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21세기라고는 하나, 미국 땅에 산다고는 하나 어찌보면 빠르게 변하는 한국 세태보다 한없이 느린 LA에서 시집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 며느리는 분명 약자다. 시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손위든 아래든 시누는 강자가 아니겠는가.
“베풀면 마음이 푸근해지게 마련”
시집 와 밝고 명랑하게 잘 살아주니 고맙고
조건없는 내리사랑 10년에 그저 감사할 뿐
비즈니스도 같이 하다보니 인생의 길동무로
<올케가 살갑게 하죠. 나뿐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그렇고. 문제가 생겨도 맘에 담아두는 법없이 금방금방 풀어버리고, 그래서 지금까지 별 탈없이 살아온게 아닌가 싶어요.”
“고맙죠. 없는 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밝고 명랑하게 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여기서 강자가 약자를 몰아 붙이고 괴롭힌다면 갈등의 골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요즘 세태가 변해 ‘못된 며느리’들도 많다지만 대한민국 유사이래 여전히 며느리에게 시댁은 불편하고 강한 존재다. 그래서 엘렌씨의 조건없는 내리사랑은 더없이 빛난다. 그뿐 아니다 엘렌씨 부부가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 부부에게 베푸는 정은 과하다 싶을 만큼 눈물겹다.
“평생 잊을 수가 없죠. 결혼하고 저희가 어려웠을 때였는데 물론 언니네도 그리 풍족하진 않았을 때였어요. 고기나 구워 먹자고 언니네 부부가 집으로 초대해 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저희에게 적지 않은 현금을 내주셨어요. 기반 잡는데 쓰라고. 부모자식간에도 그렇게 큰 돈 내어주기가 쉽지 않을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줄까 싶으니까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마음의 빚이죠.”
‘돈 가는데 마음 간다’는 속물적인 표현까지 꺼내지 않아도 세상에 이런 시누가 있을까 싶다. 그 뿐 아니다. 살림 솜씨 뛰어난 엘렌씨는 김치 냉장고는 물론 비싼 주방용품들도 써봐서 좋으면 올케 것도 당장에 뛰어가 사서 건네준단다.
“그런게 무슨 이야기 거리가 되나요. 형편 좀 나은 제가 부엌일 잘 못하는 수한테 선물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겸연쩍은 듯 웃지만 수진씨 입을 타고 나오는 시누 자랑은 한도 끝도 없고 감동적이다.
살림솜씨 서툰 수진씨를 위해 늘 집에 불러 거둬 먹이는 것도 엘렌씨 몫이고, 시집 행사에서 요리하고 설거지까지도 모두 엘렌씨가 팔 걷어 붙이고 나선다. 그뿐인가. 혹여 올케가 냄비 세트라도 지나가는 말로 ‘예쁘다’고 한마디 할라치면 올케는 당장에 그 자리에서 바리바리 싸서 집으로 보낸단다.
“사실 시댁에 가면 부엌 일은 다 언니 차지예요. 워낙 요리 잘 하고 살림솜씨가 정갈하기도 하지만 제가 거들라치면 그냥 어머니 아버지랑 가서 이야기나 하라고 쫓아요. 그래서 어쩔 땐 친정에 온 건지 시댁에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예요.”
도대체 엘렌씨가 수진씨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고맙죠. 없는 집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밝고 명랑하게 잘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말을 채 잊지도 못한 엘렌씨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내가 왜 이러지, 주책맞게” 그러면서도 엘렌씨는 연신 눈가에 눈물을 훔친다.
이 아름다운 시누, 올케간이 눈물나게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본적이 있던가. 피 한방울 나누지 않은 여자들의 의리랄까, 이 뜨거운 연대감. 복숭아꽃 아래서 피의 결의를 맺은 남정네들의 의리가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사실 시댁에 가면 부엌 일은 다 언니 차지예요. 워낙 요리 잘하고 살림솜씨가 정갈하기도 하지만 제가 거들라치면 그냥 어머니 아버지랑 가서 이야기나 하라고 쫓아요. 그래서 어쩔 땐 친정에 온건지 시댁에 온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예요>
■두 동지, 꿈을 키우다
원래 엘렌씨는 융자 전문가였다. 그리고 갓 결혼한 수진씨에게도 같은 길을 걷게 했다.
한동안 부동산 경기가 좋아 월급쟁이였던 수진씨도 융자회사를 운영해온 엘렌씨도 둘 다 벌이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두 사람은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상하던 차에 엘렌씨의 손재주를 상업화시켜 보기로 했다.
“언니가 원래 손재주가 좋아요. 집안 인테리어며 요리며 못하는 게 없죠. 근데 얼마 전에 손으로 만든 카드를 봤는데 정말 비명 소리 나올 만큼 예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부추겼죠. 이걸 만들어 팔아 보자고요.”
그래서 시누랑 올케랑 의기투합, ‘KEAS Family’라는 카드 회사를 차렸다.
엘렌씨는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디자인하고 스케치를 할만큼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다. 엘렌씨 말처럼 그녀는 최근 카드제작에 완전히 ‘미쳤다’.
그리고 카드에 필요한 소품들을 만들고 오리고 붙이고 하는 일들은 수진씨 몫이다.
“카드 말고 성구 액자도 제작하는데 최근 카드랑 이런 액자들을 대형 교회 서점에서 판매하는데 반응이 좋아요. 요즘은 주문량을 못 맞출 만큼 일감이 밀려들어요. 그런데 여기서 만족할 순 없죠. 앞으론 마케팅 쪽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거 같아요.”
그리고 조만간 카드제작 크래프트 교실도 개설해 손으로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걸 좋아하는 이들의 사랑방을 꾸미고 싶은 것이 이들의 꿈이기도 하다.
“떼돈을 번다기 보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카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액자를 선물할 수 있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요.”
이 시누랑 올케만큼 예쁜 카드를 만드는 이들의 작은 소망이다.
<글·사진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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