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은 왠지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은 여유를 준다.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워도 시간이 흐르지 않고 하루가 가득히 차 있다는 느낌, 그 동안의 많은 추억들이 실타래처럼 풀어져 이 시간에 모여 있는, 과거가 모두 현재로 재현되어 어린 시절의 작은 기억까지 스크린으로 상영되는 듯, 그래서 주말은 침대에 누어서도 머릿속으로 가득 찬 하루가 되고 뿌듯한 여유를 준다.
그런 아침, 정원에서 아늑한 고요를 찢는 기계소리가 요란하다. 웬 불청객? 정원사들이 지난 주 시작했던 나뭇가지들의 전정을 이제 마무리작업을 하느라고 단잠을 깨우고 있다. 우거진 가지와 잎들을 트림해서 겨울의 강풍에 퇴로를 내주어 넘어지지 않도록 겨울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처럼 운동복을 입고 산책길에 올랐다. 며칠 전까지 싱싱하고 푸르기만 했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노랗거나 초록과 붉은 반점을 띤 가을 잎으로 변해가고 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토함산에서 보았던 빨갛게 타오르던 단풍처럼, 꺼지지 않는 불씨로 가슴의 어딘가에 입력되어있는 유년의 그리움처럼 나무들은 다시 가을빛을 띠기 시작했다.
나무를 트림하느라 바쁜 정원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노신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천천히 내 쪽으로 오고 있다. 길 건너에 사는 스미스씨다. 그는 올해 91세로 산보하면서 목에 호루라기를 걸고 다닌다. 전부터 의아해하는 나에게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호루라기로 이웃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며 웃으면서 힘껏 불어본다. 허나 그 기어드는 호루라기 소리라니…
그런데도 스미스씨는 만날 때마다 미소를 띠며 행복해 한다. 나뿐만이 아니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나누어준다. 자녀도 없는, 그렇게 나이 많은 분이 혼자 살면서 지나간 삶의 회한과 외로움을 느끼며 우울할 텐데도 소년처럼 마냥 즐거워 보인다. 주름투성이의 얼굴은 순진한 아이같이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현재를 생이 완성되어 가는 한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방황하지도 않고 현재를 행복하게 소유한다. 스미스씨는 이미 생을 달관해서 생과 사를 초월한 분인 것 같다. 그래서 현재 느껴지는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한다. 희로애락을 넘어서 생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은, 주어진 생을 노력하며 충분히 사는 사람은 다가오는 죽음에도 이렇게 의연하고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파우스트’의 저자인 괴테는 “인생의 의미는 돈이나 명예나 쾌락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과 고생 속에 숨어 있다. 자유도 생명도 그것을 매일매일 노력해서 얻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깨우친다. 그의 인생관은 자기의 생을 완전히 살아버린다는 것이다. 운 좋게 태어나서 천재성으로 이룩한 화려한 생이 아니라 노력과 근심에 가득 찬 끊임없이 돌아가야 하는 치차 같이 그는 부단한 자기 연마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룩한 생의 완성자이며 동시에 문학과 인생의 거목이었다.
가지를 쳐내는 아픔을 감내하며 묵묵히 서있는 나무는 속으로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깊은 땅속 흙과 바위틈에 거미줄 모양 뻗어서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흡입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뿌리와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는 피나는 삼투작용으로 저 멀리 가지 끝까지 물을 전달하는 줄기들, 그 노력의 대가로 꽃 피고 열매 맺고 울창한 잎을 피우는 나무는 아무 두려움이나 방황이 없어 보인다.
겨울이 되면 잎이 다 진 겨울나무의 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서로 조화롭게 뻗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지들이 서로가 상대를 배려하듯 여유를 두고 자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만이 생존의 이기주의로 경쟁하느라 초조하고 불안한 삶을 서로 엉켜 살고 있다.
욕망 덩어리의 인간사회도 이성과 양심으로 트림하여 마음을 비우고 한결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산다면 좀 더 밝은 세상에서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고 다양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 겨울로 들어서기 위해서 나무도 가지치기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김인자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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