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거리’가 ‘정 거리’라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어야 정 들겠지만 그러나 자주 만나지 못해도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정을 어디 눈 거리 정에 비교할 수 있을까.
11년 전 한국에서 열렸던 한민족 문인대회에 참석했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작가 신예선 선배와 같이 마포에 있는 소설가협회 사무실을 방문했었다. 그날 마침 한국소설가협회 이사회가 있어 많은 선배 작가들을 만났는데 남은 서울 일정을 물으시는 홍성유 회장님께 “갈대 보러 제주도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문화일보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곽의진씨가 제주도에 가야 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진도 강진으로 가자고 했다. 좌중에 있던 선배들이 이구동성 문인들한테는 제주도보다 진도가 더 좋다고 권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해외에서 온 문인을 고국의 가을 정취에 젖게 해주고 싶어 하는 작가 곽의진씨를 따라 신예선 선배와 같이 진도 강진으로 갔던 여행이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었다.
계집 ‘여’ 셋이면 간사할 ‘간’자가 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코스모스와 갈대가 갯바람에 몸부림치듯 사열하던 그 가을, 글 쓰는 세 여자의 만남은 아름답기만 했다. 어느새 눈빛으로 서로의 정을 보듬으려 눈에 닿는 하늘과 모든 사물들을 존경하는 마음까지 하나가 되었다.
그때 곽의진씨는 강진에 있는 이퇴계의 사당에서 집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설을 통해 강진에 숨겨져 있는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어 그 지역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대우를 우리도 같이 받은 것이다. 진도를 이끌어가는 소탈한 인사들도 많이 만났다.
그중 배를 타고 바다와 하늘 사이 작은 섬에 가서 바닷장어를 잡아 즉석구이를 해주던 배우 클락 게이블 같이 수염을 기른 바다 사나이의 풋풋한 인정도 잊을 수 없다.
온통 갈대와 코스모스가 춤추는 황홀지경인 섬 갯가를 돌고 돌다가 끝내 산으로 올라갔다. 그 산 위에 앉아 우리들은 서로 숨길 것도, 부끄러움도 없이 가슴을 열었고 그리움이 사무치는 노래를 바닷바람에 실어 가없는 곳으로 띄우기도 했다.
소설을 쓰는 공통분모만으로 그렇게 정이 통 했을까. 한길 물속은 알아도 한 치 사람 속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솔직하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계산에 밝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마음은 알 필요조차 없다. 아무리 자주 만나도 거기서 거기, 그렇고 그런 사이를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 친구의 정은 그 깊이를 측량해 봐야 한다.
멀리 있어도 이름 부르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뻐근해지는 친구, 언제 만나도 한결같은 느낌인 친구가 몇이나 되는지, 그리고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친구들과의 추억이야말로 삶의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까.
나는 이맘때면 그리움에 못 겨워 그 바닷가 산정을 그리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그 친구를 생각한다. 그리고 신예선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그때처럼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진도의 비린 갯바람에 하늘거리는 갈대와 코스모스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사귐에는 먼저 고마움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작은 배려도 잊지 않고 쌓다 보면 어느새 정이 깊어진다. 우정을 어디 어설픈 이성간의 사랑에다 비기랴!
그 무엇, 어느 것 한가지로 일맥상통해도 좋다. 슬픔을 같이 나누고 기쁜 일에 시기심 없이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친구, 그리고 모든 사연을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이다. 그런 친구는 세상을 떠난 후라도 그 추억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행·불행은 손바닥 앞뒤 같기도 하다. 가을은 아름다운 슬픔을 지닌 계절이어서 더 우울해지거나 더 명랑해질 수 있다. 그래서 아픈 기억들은 삼켜버리고 아름다운 추억과 정겨운 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우리들의 작은 우주에는 고운 사람만 남게 된다.
그렇게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너그러움과 이해와 용서가 싹터 마음의 감정은 밀려나간다. 추억과 회상은 시간의 여유이기도 하다. 만년 소년소녀로 살고 싶으면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김질해야 한다. 어쩌면 문학과 다른 예술도 아스라한 추억으로 이어온 끈에서 생성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성호 /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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