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도 갈 수 있구나!”- 함흥이 고향인 한 친지는 눈물이 솟더라고 했다. 길 없는 곳인 줄 알았던 그 곳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 60년 만에 확인하는 충격이었다.
남가주 시간으로는 지난 1일 오후 5시쯤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 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감회에 젖었다.
임기 말 인기 없는 대통령의 업적 욕심, 대선 판세를 흔들려는 정치적 계산 등 부정적 논평들로 2차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상당 부분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막상 군사 분계선이 TV 화면에 나오고 그 노란색 선 위에 노대통령 부부가 발을 딛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민족으로서 피의 본능 같은 것이다.
특히 이북(실향민들에게는 ‘북한’ 보다 이 말이 더 친근하다)에 가족이 있는 분들에게 그 광경은 수십 년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한을 헤집어 내는 아픔이었다. 평생 운명으로 여기며 겪어냈던 그리움, 회한, 상실의 고통이 한 발짝이면 넘을 수 있는 그 선 때문이었다니 기가 막힌 것이었다. 70대 초반인 나의 친지는 말했다.
“이북 실향민들 중 아마 70% 이상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거예요. 모두가 한을 품고 갔겠지요. 이런 일이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남북관계가 빨리 좋아져서 남은 사람들이라도 죽기 전에 그렇게 걸어 갈수 있어야 할 텐데요.”
대학 교직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지난해부터 북한 돕기 봉사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단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이 앞서지만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만해도 그에게는 딴 마음이 있었다. “단체를 돕다 보면 혹시 이북에 좀 쉽게 갈 길이 열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이북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지를 그는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1951년 흥남부두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월남한 그는 평생 고향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이북가족 상봉 프로그램이 막 생겨난 80년대부터 이제까지 5번 북한을 다녀왔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이북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장도이다.
LA에서 북경으로 가서 다시 평양으로 들어가느라 우회하는 길 자체도 길지만 더 긴 것은 여행에 소요되는 기간이다. 북한 들어가는 비자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친북 주선단체를 통해 미리 다 받은 비자를 북경에 가서 다시 발급받아야 하는 데 그 과정이 과거에는 일주일씩 걸리다가 근년 이틀 정도로 단축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집 떠나 평양까지 들어가는 데만 4-5일이 걸린다.
미국신문의 보도를 보니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125마일이다. 자동차로 두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지척이다. 그 가까운 직행로를 두고 멀리 돌고 돌아서 가족 얼굴을 한번 볼 수 있었던 것이, 그것도 운 좋은 극소수 이산가족들의 처지였다.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의 생명은 사람의 발걸음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면 깊은 산중에도 길이 생기고, 발걸음이 끊어지면 멀쩡하던 길도 사라진다. 길을 새로 만들려면, 없어져버린 길을 되살리려면, 많이 다닐 수밖에 없다. 노대통령이 군사분계선 앞에서 말한 대로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이다. 장벽은 무너질 것이다”
2박3일의 남북정상회담 후 총 10개항의 합의사항이 발표되었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다. 남북 간 고질적 인식 차이와 불신을 딛고 그만한 ‘선언’을 합의해낸 것만도 발전이다. 그대로만 된다면 한반도가 이제까지의 대치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만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선언’에서 ‘실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번 경협 합의사항 역시 ‘너무 퍼주기’라는 비판이 이미 보수진영으로부터 거세다. 그래서 그 길을 가지 말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남북 대치상황으로 우리 민족이 국가적 개인적으로 겪은 손실과 고통이 너무 크다. 길 위에 장애물이 있다고 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 발을 내디디면 언젠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북 가는 길’이 좀 가까워져야 하겠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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