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의 나이에 매일 일기를 쓰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경기도 포천군에 사는 홍영녀 할머니이다. 평생 학교에 가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손자에게서 한글을 배웠다. 그러고 나니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일흔이 되도록 전화도 걸지 못했다. 숫자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역시 손자에게서 숫자를 배운 후 난생 처음 혼자 힘으로 딸네 집에 전화한 날을 할머니는 잊을 수가 없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여기지도 않는 지극히 작은 지식이 이렇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일흔에 숫자를 배워 전화번호를 눌렀을 때의 감동이 공부 많이 한 누군가가 박사학위 논문을 마쳤을 때의 감동보다 덜 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진 것이 너무 적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유가 더 소중하고 빛나는 것 - 지식, 물건, 사랑 …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누리는 행복이다.
물질문명이 극에 달한 것일까. 그에 대한 반작용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너무 많이 생산하고 너무 많이 소비하는, 소비중독 사회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를 축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수레바퀴에 쐐기를 박고 싶어 하는 일종의 반(反) 문화운동으로 프리건(Freegan), 프리거니즘(Freeganism)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프리건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말하는 비건(vegan)에 자유롭다(free)는 말을 붙여 만든 신조어. 1990년대 중반 시애틀과 포틀랜드에서 환경오염과 세계화 반대운동을 위해 결성되었다가 ‘폭탄 대신 식량(Food Not Bombs)’ 등의 단체들과 연계하면서 발전된 조직이다.
‘폭탄 대신 식량’은 1980년대 초 보스턴 인근의 케임브리지에서 핵시설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단체. 핵 프로젝트 회의장 앞에서 ‘폭탄 대신 식량에 돈을 쓰라(Money for Food, not for Bombs)’는 슬로건을 외치며 무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준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슬로건을 간단히 줄여서 단체의 이름으로 삼았다.
전 세계에 200개 지부가 있는 이 단체의 주장은 전쟁하는 데 쓸 돈을 사람들 먹이는 데 쓰자는 것. 한쪽에서는 너무 많아서 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죽어가는 기현상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수퍼마켓, 식당, 베이커리 등에서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처분된 식품들을 모아 무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데 채식을 원칙으로 한다.
프리거니즘은 한마디로 반 소비주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너무 만들어 내고, 너무 사들이고, 너무 버리는 과잉생산, 과잉소비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며 덜 쓰고, 덜 버리는 생활을 하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이들은 새 물건 안사는 것은 기본이고 남들이 버린 물건을 재활용하느라 빌딩이나 수퍼마켓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일과이다.
그런데 미국의 쓰레기통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유효기간 갓 지난, 먹는 데는 전혀 지장 없는 통조림, 빵, 시리얼 등 식품부터 악기, 옷, 장난감, 게임, CD, 전자제품, 부엌 용품 등 쓰레기통만 뒤져도 먹고 입고 사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아울러 대기오염의 주범인 자동차는 가능한 한 타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손빨래를 하는 등 의식주를 환경보호 차원에서 해결하자는 의식화 운동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가면 보통 사람들은 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소비를 부추기는 모든 경제활동을 거부한다며 잘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무숙자 비슷한 생활을 하는 극단적인 케이스들이다. 혹시라도 자녀가 이런 프리건이 된다면 부모로서는 보통 걱정이 아닐 것이다. 거의 반사회적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프리건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단아로 끝날 지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자고새면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지는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익사하지 않으려면 ‘방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유와 소비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이다. 덜 가져서 더 소중함을 아는 지혜를 얻을 때가 되었다. 아흔 살 할머니의 ‘숫자’처럼 빛나는 소유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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