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점등을 하면 상점 안에 있던 4,000 가지가 넘는 카드가 일제히 깨어난다. 밤새 숨죽이고 있다가 형광등이 켜지면서 그들의 존재가 밝은 세상에 등장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사연이 써있는 그 많은 카드 중에서 자신에 꼭 맞는 메시지가 담긴 카드를 고르느라 손님들은 여러 카드를 연이어 읽고 있다. 그 한쪽 코너에 책이 진열된 스탠드가 있는데 놀랍게도 그 작은 랙이 인기가 짱인 것이다.
그 코너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올 때마다 새 책이 나왔는지 확인하며 지나간다. 책들은 철학이나 전문지식에 치우치지 않는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읽기에 즐거운 종류들이다. 우정이나 사랑, 가족관계, 자녀를 키우면서 느끼는 일들, 행복한 삶의 추구나 스포츠 등 생활의 즐거움과 행복한 생의 지혜가 담겨있는 책들이다.
30여 년 전 미국에 왔을 때, 미국사람들의 외양만 보고 풍요한 달라 문화에 젖어 책은 읽지 않고 마켓에서 잡지나 사서 읽는 사고의 깊이가 단순한 사람들이 주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국생활에 젖어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고 책을 선물하며 이 복잡한 다원화 시대에도 책을 꾸준히 읽고 있다.
요즘 세상은 전문지식은 많으나 지혜는 적다는 지적이다. 모든 것이 시속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책을 읽고 느끼고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가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현대는 보다 빠르게, 적게, 얇게 그리고 값싸게 하는 시대이며, 시간이 걸리는 것은 거추장스럽고 삶을 소모하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분초를 다퉈 빠르게 변화하는 세속적 흐름의 와중에 서있다고 진정한 삶을 소유하는 것인가? 책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현자들의 사상이나 위대한 지혜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은 흐름의 역행에 불과한 것인가?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의 저자인 보니 엔젤로는 루즈벨트부터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어린 시절 모두 독서광으로 위인전 등을 좋아하는 공통된 독서 경향을 가졌다고 했다.
미국의 명문가인 케네디 가를 보면 케네디 어머니는 9남매를 키우면서 자녀들의 독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서 아예 독서리스트를 따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특히 존 F. 케네디는 어려서부터 위인들의 전기와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오늘의 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하는 습관이었다”고 술회한 빌 게이츠는 어릴 적 별명이 책벌레였다. 하물며 컴퓨터 황제인 그가 “컴퓨터가 결코 책의 역할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독서의 중요함을 짐작케 한다.
그 뿐인가 “내가 세상을 알게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고백, 20세기의 지성이며 철학자,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천장까지 책으로 쌓인 외할아버지의 도서실이 바로 놀이터였던 그는 진정 책 속에서 성장해서 책과 더불어 세기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책 속에서 찾는 것, 그것은 위대한 인격을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며 우리가 모르는 지나간 시간을,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삶과 지혜를 찾는 것이다. 오랜 세월 세기의 지성인들이 고뇌하며 밤잠을 설치고 개발해낸 아이디어와, 그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역사와 지식과 예술이 녹아있는 묵직한 책들, 미와 정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들, 그들을 아끼고 읽고 사색하지 않는다면 책들은 내용 없는 장식가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책들이 /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 하지만 가만히 알려주지 /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는 길 // 그대에게 필요한 건 모두 거기에 있지 / 해와 달과 별 / 그대가 찾던 빛은 / 그대 자신 속에 깃들여 있으니 // 그대가 오랫동안 책 속에 파묻혀 / 구하던 지혜 / 펼치는 곳마다 환히 빛나니 / 이제는 그대의 것이리” <헤르만 헤세, ‘책’>
오늘도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주름을 펴보고 싶어 밤새워 책장을 넘기고 있다. 안개같이 엉켜진 삶의 길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김인자 /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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