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인간의 남자들을 사랑했다. 젊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요즘말로 하면 ‘꽃미남’ 들이었다.
그들 꽃미남 중에서도 에오스가 유독 사랑했던 남자는 티토노스였는데 여신은 인간인 그의 유한성이 안타까웠다. “이 아름다운 남자가 영원히 내 곁에 있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에오스는 제우스에게 티토노스가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고 제우스는 여신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여신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티토노스의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팽팽하던 피부는 축 늘어지며 주름투성이가 되기 시작했다. 인간은 생명뿐 아니라 젊음도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여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이 죽지도 못하고 끝없이 늙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늙고 늙은 티토노스는 나중에 껍질만 남고 목소리만 겨우 남았다. 그런 그를 여신은 골방에 가두고 매미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염원을 담은 신화, 하지만 무조건 오래 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꼬집은 신화이다. ‘얼마나 오래 살까’ 보다는 ‘어떻게 오래 살까’가 화두가 된 요즘에는 특히 실감나는 이야기이다.
미국인의 평균수명이 78세에 이르렀다고 질병통제예방국이 며칠 전 발표했다. 1955년에는 69.6년, 1995년에는 75.8년이었던 기대수명이 2005년 출생 어린이 기준 77.9세로 늘어났다.
한국인의 수명은 이보다 좀 더 길어서 평균 78.5세이다. 지난 5월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5년 통계기준 한국인 여성의 평균 수명은 82세, 남성은 75세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인 우리는 대략 78세 즈음을 우리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통계는 유아 사망, 사고로 인한 사망 등 젊은 나이에 사망한 사람들까지 모두를 포함한 수치이다. 건강에 별 이상 없이 중년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 보다 훨씬 더 오래 살 게 된다. 지금 50대라면 적어도 80대까지, 30년은 산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물론 90살, 100살까지 장수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 긴 세월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같은 30년이라도 20대부터 50대의 30년은 변화가 많은 기간이다. 대학 졸업하고, 직장 잡고, 결혼 하고, 아이들 낳아 기르고, 그 아이들 대학에 보내고, 결혼시키고 … 끈임 없이 일이 많아서 숨 돌릴 틈 없이 바쁘다. 삶은 대도시의 사거리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 같이 번잡하다.
반면 노년의 30년은 망망대해 앞에 홀로 서있는 것 같은 시간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또 오늘 같은 아득한 시간의 연속이다. 아무 준비 없이 무턱대고 걸어 들어가기에 노년의 시간은 너무 길다.
입시 준비, 취업 준비, 결혼 준비 … 평생 ‘준비’하면서 산 삶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노후 준비’가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제우스 대신 현대과학이 우리에게 선사한 고령화 시대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노년기의 오복(五福)으로 건(建)·처(妻)·재(財)·사(事)·우(友)를 꼽는다. 몸 건강하고 적당히 품위 지킬 만큼 돈 있고, 할 일이 있고 아내와 친구가 있어야 노후가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나이 들어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 건강, 둘째 돈, 셋째 친구, 넷째 딸이라는 말도 있다. 여성의 노년기 사복(四福)이 되는 셈이다. 건강과 돈, 친구는 앞의 오복과 같은 데 여성에게는 일 대신 딸이 들어갔다. 노년에는 꼼꼼히 챙겨주는 딸 가진 할머니들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모두는 무엇을 위함일까. 결국은 고립을 피하자는 것이다. 노년에 가장 두려운 것은 고립이다. 노인자살의 원인을 보면 병고와 외로움이 가장 많다. 몸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으니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그렇다고 누가 찾아주지도 않으면 완전한 고립 상태가 되는 것이다. 티토노스 처럼 골방에 갇히면 장수는 나날이 고통일 뿐이다.
길고 긴 노년에 대비해 건강도 챙기고 돈도 가능하면 모아보자.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친구들을 사귀는 일이다.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 두는 것만큼 노년에 큰 재산은 없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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