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영국이 자랑하는 초호화 여객선 타이태닉이 2,000명이 넘는 승객을 태운 채 뉴욕을 향해 처녀항해를 했다. 최신 시설을 갖춰 절대 안전한 것으로 여겨지던 이 거함은 그러나 어이없게도 짙은 안개 속에서 빙산과 충돌하면서 가라앉아 버린다. 1997년 개봉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타이태닉’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승객들이 거대한 공포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 그런 가운데서도 승객들은 선장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구명보트로 옮겨 탄다. 문제는 구명보트의 수용능력이 1,000명에 불과하다는 것. 선장은 우선적으로 노약자와 부녀자, 그리고 아이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옮겨 타도록 조치한다. 자기 차례가 왔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노인도 있었으며 승무원들을 돕겠다며 일부러 배에 남기를 자원한 젊은이도 있었다. 물론 자기 먼저 살겠다고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밀치고 구명보트에 매달린 남자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타이태닉호의 침몰은 해양대국 영국의 명예에 먹칠을 했지만 동시에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일깨워 준 참사였다.
타이태닉호의 침몰 속에서 감동적으로 발현된 ‘어린이와 여자들 먼저’라는 전통은 이보다 수십년 전 발생한 영국 해군함 ‘버큰헤이드호’ 참사에서 비롯됐다. 영국 해군이 자랑하던 수송선 버큰헤이드는 1852년 장병들과 그 가족 등 600여명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해 가던 중 케이프타운 인근에서 암초에 부딪힌다. 배는 두 조각이 나면서 가라앉기 시작했으며 죽음에 직면한 승객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때 사령관인 시드니 세튼 대령은 전 장병들을 갑판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장병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집합해 부동자세를 취했으며 그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횃불을 밝힌 채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보트로 옮기는 작업이 차분히 진행됐다.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 옮겨 타기를 끝냈을 때 버큰헤이드호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병들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여자와 어린아이 먼저’라는 고귀한 전통은 여기서 시작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해상에서 사고가 나면 힘센 자들이 먼저 구명정에 올라타 살아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국이 인류에게 남기고 있는 위대한 문화와 가치의 유산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전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극한상황에 직면했을 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에 제법 의연해 하고 점잔을 떨던 사람도 극한상황, 특히 죽음을 앞 둔 상황에 도달하면 본성이 나온다. 평소 강해 보이던 사람들이 강한 것이 아니고 극한 상황 속에서 용기와 자제, 그리고 양보의 미덕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것이다. ‘여자와 어린아이 먼저’라는 고귀한 전통은 정말 강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다.
얼마 전 지인의 조촐한 출판기념회에 갔더니 사회자가 ‘당신 멋져’라는 구호로 건배하자고 제의한다. 사회자가 ‘당신’하고 선창하면 참석자들이 ‘멋져’라고 화답하는 방식이었다. ‘당신 멋져’는 ‘당당하게 살자. 신나게 살자. 멋있게 살자. 그렇지만 가끔은 져주며 살자’의 약자이다. 옆 사람에게 “괜찮은 구호 같다”고 했더니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건배구호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시장질서에 따른 경쟁을 통한 성장’이라는 외피를 두른 신자유주의 아래서 ‘배려’와 ‘양보’는 성가신 어휘이다. 경쟁과 순위가 있을 뿐이다. 양보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녹슨 훈장처럼 낡은 가치가 돼 버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져주며 살자’는 구호가 더욱 와 닿는다.
그런 가운데 들려온 아프간 인질 이지영씨의 석방 양보 소식은 감동적이면서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확실히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상황을 불확실한 미래와 바꿀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살신의 양보’를 통해 녹슨 훈장 위에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를 훅 불어 버렸다.
만약 당신이 이지영씨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국의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는 “우리는 사심 없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자신의 삶이나 친척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한바 있다. 지영씨의 선택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차선 양보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하리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리들리의 지적마따나 어차피 인간은 설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성향이 있으니 말이다. 지영씨의 양보가 더욱 빛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인질석방 협상이 잘돼 19명 모두가 곧 풀려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지영씨가 환한 얼굴로 돌아오는 날, 우리 모두가 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이렇게 외쳐보면 어떨까. “지영씨, 당신 멋져!”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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