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로 선 자식, 이제 놔주자
지나친 간섭은 부작용만 낳아
한 건축업자가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큰 단골이었던 부동산 개발업자를 찾아가서 “그동안 많은 일을 맡겨주어서 감사하다”고 고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마지막으로 집 하나만 더 부탁할 수 있겠느냐고 애걸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부려먹고 은퇴도 내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구나”라고 원망하면서도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억지로 수락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터는 바닷가 경치 좋고 호젓한 곳이었고 설계도 이 건축업자 마음에도 쏙 들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짜증이 나 있는데 이런 좋은 집을 남에게 지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울화가 치밀어서 여태껏 하던 것과는 달리 모든 것을 눈가림 일색으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사가 다 끝나고 잔금을 받는 날을 맞았는데, 그 부동산 개발업자는 잔금을 다 치르고 나서는 놀랍게도 방금 받은 집 열쇠와 함께 집의 명의를 이전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서류를 내어 놓았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 집을 우리의 성의로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받고 싶은 대로 해주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 그대로, 정성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수 있던 것도 못 받은 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회생활이란 서로 도우면서 사는 것이고, 우리는 항상 남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그 대가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으며 살고 있다. 위의 건축업자도 평생 남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은퇴하게 되었을 때에는 잠깐 생각을 잘못해서 받을 수 있을 만큼 최대로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경우이다. 농부들도 마찬가지로 항상 농사만 지을 수 있는 것은 남이 먹을 채소를 정성껏 만들어 출하를 하면 그 대가로 그들의 필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어느 건축업자가 집을 지어 놓고는 무슨 마음에서인가 집 구매자에게 그 집을 내놓지 않는다거나 농부가 가꾼 채소를 출하를 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둔다거나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에는 그럴 건축업자들은 없고 그럴 농부도 없는데 어떤 부모들은 기껏 열심히 자식을 키워 놓고는 끝까지 품에 품고 ‘출하’를 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특히 온갖 정성을 들여 잘 키운 자식들의 부모일 때가 많은 것을 본다.
우리 딸 중 여름방학 동안에 한 좋은 음식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일을 하던 딸이 있는데, 종업원의 친구나 식구는 반값만 내면 되니까 자기가 그만 두기 전에 꼭 한번 오라고 졸라서, 지난주 아이들과 함께 가 보았었다. 그랬더니 우리가 주문한 것 이외에도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주문해 주어서 막 식사를 하려는데, 마침 그때, 한 독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식사가 다 끝나도록 잘 먹지도 못하고 열심히 전화만 받았는데 그 부모에게 조언하고 싶은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Get a life!”라는 말일 것이다.
그 분은 두 딸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또 그 딸들도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맏딸이 가끔 늦게(?) 밤 12시에나 귀가를 하고, 잘 때 보면 입에서 술 냄새가 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모에게 “Get a life!”라고 말해 드리고 싶은 이유는, 이 부모의 자세가 마치 건축업자가 집을 잘 지어놓고도 집주인에게 집을 양도 안 해주는 것같이, 또 농부가 기껏 잘 지어놓은 수확물을 시장에 출하하지 않고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것과 같이 딸을 수중에서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본인도 새로운 도전으로 많은 유익하고 재미난 일들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대인들은 13세 때 바미츠바를 치르는데 이것은 일종의 ‘자식 출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을 다 가르쳐 주고 ‘이제부터는 이 율법을 잘 지키며 살겠습니다’라고 창조주 하나님과 만민 앞에서 선서하게 하는 식인데, 그 순간부터 모든 삶의 책임을 부모가 아닌 본인이 직접 지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우리 나름대로 조금 늦게 ‘출하식’을 했는데, 그 출하식을 기점으로 모든 행동을 부모가 아닌 하나님한테 직접 책임을 지게 한 순간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독립의 순간이요, 삶의 소유권을 완전히 이양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혹 그 중 하나가 ‘늦게’ 들어왔다고 해도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또 들어와서 자는 것을 혹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나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았던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보호자가 아닌 상담 내지 후견자가 되기를 힘썼고 그들의 인생의 ‘운전석’에는 그들 자신을 앉히기를 노력했으며, 우리는 조용히 뒷바라지만 열심히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막내의 도시락도 싸줄 필요가 없어진 이 때에 그들에게 대학이란 ‘아주 딴 차로 이전해 가는 과정’이 되기도 했고 또 우리 부모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의미를 물색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컴퓨터 백그라운드도 가족사진에서 LA 감옥의 조감도로 바꿨고, 휴대폰의 배경사진에서도 아이들 사진을 빼어놓았던 것이다. 자녀 교육은 우리에게 맡겨주셨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였었지만 이제부터는 또 다르고 중요한 임무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자식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오직 이제는 보호자보다는 최고의 시아버지가 되어주고 또 최고의 장인이 되어주는 꿈으로 부풀어있다는 것뿐이다.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주는 것은 또 그 다음에 바라볼 목표가 되겠지만.
벌써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만치 여름은 빨리 지나갔다. 우리가 키운 자식들은 여름내 여기저기서 일하고 공부해서 또 한 번의 비약을 준비하고 있는데 과연 내년 여름에는 또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자못 기대가 된다. 이제 내 자식 걱정은 놓고 감옥에 갇혀 있는 또 다른 ‘자식’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붓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었던 부모도, 자는데 코를 들이대준 부모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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