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의식 속에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단어인 ‘엄마’와 ‘아빠’가 욕이 되는 사회가 있다. 물론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올더스 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바로 그런 사회다.
1932년 쓰여진 이 소설은 A.F. 63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A.F.의 F는 대량생산 기술의 선구자인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약자이다. 그의 출현 후 632년이니 대략 260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A.F.에서 이미 눈치 챘겠지만 ‘멋진 신세계’는 인간이 기계처럼 생산되는, 결코 멋지지 않은 세계이다. ‘멋진 신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자동차가 만들어지듯 출산기계에서 태어나고 남녀는 가정을 이루지 않은 채 살아간다. 이곳의 사람들은 ‘부모’니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은 단어만 들으면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붉힌다. 모두는 모두에게 그저 섹스파트너일 뿐이다.
이런 사회를 과연 멋지다고 할 수 있을까. 힉슬리는 역설적인 제목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헉슬리는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정신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문명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썼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소설이지만 최근 가정의 의미와 형태가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멋진 신세계’가 몇백년 후까지 그저 공상에 그칠 것 같지 않다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여성방송인이 ‘싱글 맘’을 선언하고 현재 임신 중이라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두 번 이혼한 이 방송인은 몇 달전 정자를 기증 받아 시험관 아기 시술로 예비엄마가 됐다는 것인데 이 사실을 밝히면서 “생물학적 아버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 사회적 파장까지 불러일으켰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는 변화하게 돼 있다.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에는 정형화 된 한 형태의 가족만이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사회나 문화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편부와 편모 가정, 정식 결혼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동거인 가정, 그리고 동성커플 가정에 이르기까지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존재하고 있다. 정상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요소가 있다는 의미의 ‘결손 가정’이란 말은 이제 어휘로서의 효용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가정의 형태 변화를 부채질하고 있는 현상의 하나가 ‘정자아기’들의 급증이다. 여성들이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공급받아 인공수정으로 아기를 낳는 일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만 매년 3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 방법에 의해 태어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자아기는 불임부부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싱글들 혹은 여성 동성커플들이 아기를 갖기 위해 정자은행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절반을 넘는다.
CBS방송의 대표적 시사 프로그램인 ‘60분’(60 Minutes)은 최근 정자아기들의 급증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다룬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정자를 받는 여성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히 ‘아빠 될 사람의 질’이다. 신체적으로나 지능면에서 뛰어난 남자의 정자를 받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다 보니 괜찮은 조건의 정자들은 수요가 뜨겁다.
샌디에고 정자은행에 보관됐던 ‘48QAH’도 그 가운데 하나. “키 193센티미터에 체중 86킬로그램,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의대 재학생”이 ‘48QAH’의 자기 소개서이다. 의대 재학 중 학비를 벌기 위해 정자를 많이 기증했던 ‘48QAH’는 현재 결혼해 미시간에서 소아과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CBS가 그를 직접 만나 보니 소개서에 나온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의 정자를 통해 태어난 아이가 확인된 것만도 수십명에 달한다는 점. 이들은 비록 한번도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이지만 이복 형제자매들이다. 인기 있는 정자를 통해 수십명이 형제자매로 맺어지는 사례는 이외에도 적지 않다.
아이를 남녀간 사랑의 결실이라고 볼 때 정자 기증을 통한 자발적 싱글 맘은 기능적, 도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보다 더 절실히 제기돼야 할 사실은 바로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정자아기들이 지금 추세로 급증한다면 앞으로 100년 후 선남선녀들은 이러 대화를 주고 받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 사귑시다.” “먼저 아버지 확인부터 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정자 번호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K자 O자 R자 E자 A자 쓰십니다.” “다행히 나의 아빠는 아니군요. 그래요, 우리 사귀어요.”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