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집에서 이야기 합시다” “그래요. 조금 있다 봐요”
론 엔지브랫슨이 며칠 전 아내 셰리와 나눈 대화이다. 재정 담당 디렉터인 아내는 “하루 종일 회의였다”며 피곤해했고 남편은 집에 도착하면 그 내용을 듣겠다고 했다. 부부가 퇴근길에 으레 주고받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 대화였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전화를 나눈 시간과 장소였다. 시간은 지난 1일 오후 5시45분께, 아내 셰리는 미시시피 강을 가로지르는 I-35W 고속도로 다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연속 회의로 지친 그는 어서 집으로 가고 싶어 퇴근길 차량으로 꽉 막힌 고속도로 위에서 조바심을 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집에 도착해 저녁준비까지 다 끝냈을 시간이 되어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딸이 수 없이 전화를 했지만 아내는 셀폰을 받지 않았다.
미니애폴리스 교량 붕괴사건 속보들을 인터넷으로 살펴보다가 2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접한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아침 뉴욕타임스 인터넷 판을 열어보니 백인 중년여성의 얼굴 사진과 함께 낯익은 이름이 눈을 끈다 - 셰론 앤지브랫슨. 사망자로 분류되었다. TV 뉴스에도 나왔던 그 남편의 충격과 고통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집에서 이야기 합시다” “조금 있다 봐요”는 그가 아내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미니애폴리스 교량 붕괴 사건으로 전국이 ‘다리 비상’에 걸렸다. 이번에 무너진 교량과 구조적으로 비슷한 다리들이 전국에 많이 있어서 관계 당국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
4차선씩 8줄로 자동차들이 줄지어 달리던 거대한 교량이 한순간에 뚝 뚝 끊어지며 60피트 아래 미시시피 강물로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후진국도 아닌 미국에서, 지진도 테러도 없이 갑자기 다리가 무너지고 차량들이 장난감처럼 휙휙 날아 수십 길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광경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생존자들 역시 “영화 같았다”며 자신들이 겪은 사태를 믿을 수 없어 했다.
하지만 아침에 나갔던 아내, 남편, 아들, 딸이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에게는 ‘비현실적’일수도 ‘영화’일수도 없는 차가운 현실일 뿐이다. 콘크리트 교량처럼 1%의 의혹도 없이 단단해 보이던 그들의 일상이 뚝 뚝 끊어져 버렸다.
“미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나?”하며 놀랐던 1일 저녁 우리 몇몇 동료들은 한국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러 갔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사건을 ‘드디어’ 가장 사실적으로 담았다고 평가받는 이 영화는 5월의 그 열흘 동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가 뭔지, 이념이 뭔지도 모르던 택시 운전사, 간호사, 고등학생, 동네 건달 등 소시민들이 어떻게 도청을 점령하고 군인들과 맞서 총격전을 벌이는 일이 가능했는지를 영화는 웃음과 눈물을 섞어가며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침에 등교했던 아들, 출근했던 남편, 친구와 영화 보러 갔던 딸, 시내 나들이 갔던 아내 … 저녁이면 돌아와야 할 그들이 피투성이의 시체로 발견되는 악몽의 순간들을 화면 가득히 대하며 가슴이 먹먹하도록 아팠다. 그들 가족이 겪었을 고통은 얼마나 크고 캄캄했을까.
“우리 아이들을 우리 품에 안아보고 싶어요!” - 아프간 피랍자 가족들은 지난 1일 이런 팻말을 들고 주한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의 도움을 호소했다. 벌써 2주전에는 돌아왔어야 할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피 말리는 하루하루이다.
일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아픔의 크고 어두운 산’을 시간 중에 만난다. 가장 소중한 것, 하지만 공기나 물처럼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잃는 경험이다. 출근했던 남편·아내가 저녁이면 돌아오고, 사랑하는 이에게 전화하면 언제나 통화할 수 있고, 비누냄새 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일들이 지금 어떤 사람들에게는 꿈에 그리는 소원이다.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고개를 들어보자.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앉은 너는 얼마나 소중한가.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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