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에피루스의 왕 피루스는 기원 전 279년 로마군과 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로 피루스왕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군사 2만5,000과 코끼리 20마리를 이끌고 로마군과 혈전을 벌인 피루스왕은 비록 승리했지만 군사의 4분의3과 코끼리 전부를 잃었다. 전투가 끝난 후 피루스왕은 이렇게 한탄했다. “이런 전투에서 한 번만 더 승리를 거뒀다가는 우리는 망한다.”
경매와 관련한 용어 가운데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가 있다. 경제학자인 리처드 탈러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승리를 획득하는 데만 몰입하다 적정선을 훨씬 넘는 대가를 지불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를 이른다.
얼마 전 비틀즈의 존 레논이 1957년 단 10파운드에 구입했던 기타가 소더비 경매에서 수십만달러에 팔렸다. 메이저리그 초창기 야구카드 한 장이 경매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달러에 팔리기도 한다. 사는 사람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한 만큼 그 만족을 그대로 유지만 한다면 효율적인 거래일 수 있지만 만약 시간이 지난 후 소장품에 대한 애정이 식어진다면 터무니 없는 가격을 지불한 셈이 된다.
경매에서는 이처럼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이기고도 오히려 낙찰되지 않음만 못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것을 탈러는 ‘승자의 저주’라고 부른 것이다.
이런 ‘승자의 저주’는 현실세계에서 자주 발생한다. 지난 2000년 영국 정부가 실시한 한 주파수 경매에 수많은 통신업체들이 응찰해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낙찰가격이 수백억달러로 치솟았다. 낙찰받은 업체는 겉으로는 승리한 셈이지만 후유증으로 휘청거려야 했다. 매장량이 분명치 않은 정유채굴권 입찰이라든가 기업인수 합병시에도 경쟁에 의한 비용상승의 대가를 치르는 승자들이 적지 않다.
한인사회 내에서도 ‘승자의 저주’는 심심찮게 목격되는 현상이다. 비즈니스와 부동산 거래에서 주로 일어나지만 단체장 선거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발생한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가 직선제로 치러지는 LA 한인회장 선거라고 생각한다.
현행 정관상 LA 한인회장이 되려면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한다. 혹 운이 좋아 입후보자가 없거나 기싸움에서 이겨 출마 희망자를 미리 주저 앉히면 손쉽게 회장이 되기도 하지만 정관대로 직선으로 맞붙을 경우에는 엄청난 출혈이 뒤따른다.
1인당 수만달러의 공탁금을 비롯, 캠페인과 사람 동원에 나가는 지출이 장난이 아니다. 4명의 후보가 맞붙었던 지난해 한인회장 선거에서는 100만달러가 훨씬 넘는 돈이 쓰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연 예산 40만달러 규모 단체의 장을 뽑는데 100만달러 이상의 돈이 들어가는 제도는 어떤 앵글로 바라 봐도 합리적이라고 하기 힘들다.
경쟁이란 일단 시작되면 브레이크를 밟기 힘든 속성이 있다. 경매가 종종 그러하 듯 말이다. 처음에는 계획성 있는 지출을 다짐하지만 승리가 지상목표가 되다 보면 합리적인 병참계획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린다. 동물원 코끼리까지 총 동원해 우선은 이기는데 전력을 쏟게 된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 뜨거웠던 관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급속히 식어 버린다. 지난 선거에서 60만 대표 운운하는 한인회장은 3,000도 되지 않는 표로 당선됐다. 선거에 들어간 돈은 7자리 숫자였다. 한인사회 숙원사업 1~2개쯤은 멋지게 해결하고도 남았을 돈이다.
이민사회 초기에 한인회는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정부와 미국 사회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창구였다. 그 공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권익이라는 측면에서는 직능단체들이 촘촘히 구성돼 알차게 활동하고 있다. 주류사회를 향해서는 젊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힘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연방하원 위안부 결의안 캠페인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한인회의 역할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무엇보다도 ‘LA 60만 한인을 대표하는 한인회’라는 거창한 명칭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자칫 명칭에 매몰되다 보면 본래의 역할은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한인회의 역할은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 돼야 하며 그런 점에서 현재처럼 많은 출혈과 부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회장 직선보다는 간선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몸집이 달라지면 옷도 사이즈에 맞춰 바꿔 입어야 어색하지 않은 법이다.
마침 LA 한인회가 한인회장 선거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정관개정 논의에 착수했다는 소식이다. 논의의 초점은 ‘피루스왕의 탄식’이 나오지 않도록 한인회장 선출에 따른 소모를 최소화하는데 두어져야 한다. ‘효율성’은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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