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를 보면 왕자가 거지로 신분이 바뀌면서 겪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거지아이와 옷을 바꿔 입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왕자는 겉모습은 거지이지만 속은 여전히 왕자.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보는 자신이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거기서 코미디 같은 일들이 생긴다.
예를 들면 쇠락한 기사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 거처로 데려갔을 때의 장면이다. 방으로 들어선 거지왕자는 말한다 -“식사 준비가 끝나거든 깨워다오”
잠을 잔 후 세면대 앞에서 하는 말 - “세수를 해야겠는데…” 기사는 아이가 허락을 받으려는 줄 알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설명을 하지만 왕자는 그게 아니다. “물을 떠다오. 그리고 너무 말이 많다”
이어 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자 거지왕자는 호통을 친다. “국왕 앞에서 앉으려는가? 무례한 놈!”
기사는 기가 막힌다. 필시 머리가 돈 아이일 것으로 이해를 한다.
똑같은 사람의 똑같은 행동이지만 외부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왕자일 때는 지극히 자연스럽던 행동이 거지가 된 상황에서는 웃음거리가 된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까. 바로 ‘권위’이다. 왕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권위의 존재이지만 거지에게는 그런 권위가 인정되지 않아서 생기는 소통부재, 몰이해이다.
스스로는 가진 것으로 여기는 권위를 상대방은 인정하려 들지 않아서 상처받는 존재들 - 오늘의 아버지들이다. 평소 보고 배운 대로 충실하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데 가족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이렇게 권위적이냐. 말이 안 통한다”며 반발하고, 그래서 이리 삐걱 저리 삐걱거리는 가정을 어떻게 통솔해야 할지 종종 혼란에 빠지는 존재들이 오늘의 중년층 아버지들이다.
이전 세대의 아버지들은 누구나 ‘왕자’들이었다. 밖에서는 힘없고 무능한 존재라도 집 대문만 들어서면 아버지는 왕이 되었다. “세수를 해야겠는데…” 한마디 떨어지면 세숫물이 준비되고, “자야겠는데…” 하면 식구들은 숨소리를 죽였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미워할 수는 있어도 아버지의 권위에 의심을 갖는 일은 불가했다. 가부장적 권위로 안정된 시대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요즘의 아버지들은 어떤가. 거지왕자와 비슷한 처지이다. 존재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되던 시절은 이미 지났는데 자의식이 따라주지를 않는 것이다. 특히 이민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미국 친구들의 아버지를 보며 잔뜩 눈이 높아져서 ‘좋은 아버지’ 되기가 그만큼 힘들다. 한 자영업자 아버지의 푸념이다.
“가족들 먹여 살린다는 생각에 주말도 없이 일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행동이 거슬려 지적을 하면 고분고분 듣는 법이 없어요.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기 일쑤고 내가 집에 들어가면 아예 얼굴을 마주치려 들지를 않아요. 한번은 붙들고 야단을 쳤더니 ‘아빠가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대드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UC계열 대학에 재학 중인 한 2세 남학생은 말한다.
“자라면서 내내 미국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아빠가 낚시 좋아하는 친구는 주말마다 아빠랑 낚시를 가고, 아빠 취미가 자동차 경기이면 같이 자동차 경기장에 가고 … 나는 아빠랑 뭘 같이 해본 기억이 없어요. 아빠에 대한 기억이라면 늘 지적 받고 야단맞은 것뿐이지요”
아버지들 사이에서 “내가 더 이상 ‘왕자’가 아니구나”하는 자각이 생기고 있어 다행이다. 10여 년 전부터 한국과 미주한인사회에서 ‘좋은 아버지 모임’‘아버지 학교’등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다. 교회 단위, 직장 단위로 아버지들이 교육받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아버지들은 새삼스럽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상대방의 눈으로 보는 법이다. 자녀의 눈으로 보면 일만 하는 아빠보다는 자전거 타는 법 가르쳐주고, 같이 놀아주는 아빠, 명령만 하는 아빠보다는 자기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아빠가 더 좋은 법이다.
가부장적 권위가 방패막이 되었던 구세대 아버지들, 권위 의식이 아예 없어 자유로운 신세대 아빠들, 그 중간에 낀 중년층 아버지들은 고달프다. 아버지들에게 요구만 할 일이 아니다. 가족들 역시 이따금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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