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지 한분이 한동안 무숙자 돕는 일을 했다. 기업으로부터 식품이나 의류 등을 기부 받아 무숙자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더라고 했다. 티셔츠 같은 옷가지를 나눠줄 때였다.
“홈리스들이 옷을 받아들면 꼭 칼라부분을 뒤집어 봐요. 상표를 확인하는 겁니다”
자신들 돕느라 나눠주면 무엇이든 감사하게 받아야지 “무숙자 처지에 브랜드 투정인가?” 싶은 언짢음은 그 순간 내게도 들었다.
“그런데 사정을 들어보니 그럴만하더군요. 그 사람들은 소지품을 많이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품질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자꾸 빨아도 괜찮은 상표를 고르는 것이지요”
‘괘씸하다’ 싶던 불쾌감은 한순간에 ‘아하, 정말 그렇겠구나’로 바뀌었다. 한마디 설명이면 백번 이해되는 일을 섣부른 지레 짐작으로 오해하고 감정 상하는 경험을 우리는 자주한다.
항공사 스튜어디스는 지금도 많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직업이지만 70년대, 80년대에는 특히 더 인기가 높았다. 여성들이 일할 직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튜어디스는 시험과 면접만 잘 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신장 몇cm 이상’이라는 신체적 자격 조건이 붙었다. 한마디로 늘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원서도 못내 본 우리 몇몇 친구들은 ‘차별이다’며 분개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항공기내 짐칸에 승객의 짐을 무리 없이 올리고 내리려면 그 정도 키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별’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던 그 당시 우리의 분개는 괜한 오해의 결과였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라는 오래 전 유행가 가사가 있다. 지독한 신뢰의 표현이다. 상대방의 어떤 말·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래서 불쾌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믿는 그가 그럴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고 푸근히 감싸 안는 마음이다.
우리의 삶이 피곤한 것은 이런 바보 같은 믿음의 실종과 상관이 있다고 본다. 저마다 똑똑해지고 이기적이 되다 보니 세상이 각박해진 것이다. 콩을 팥이라 해도 믿어주는 깊은 신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소통은 차단되고 관계들은 깨어진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관계, 가족과의 관계도 그 근간은 신뢰이다. 가족을 가족으로 묶는 것은 사랑이지만 신뢰가 없으면 사랑은 모래성이다. 부부 사이에 골이 깊어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가 비뚤어져 부모와 담을 쌓는 불행한 일들도 처음 발단은 대개 사소한 일들이다. 한번 믿고 덮어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을 괜한 의심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다가 사태가 악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우리 몸의 자연스런 작동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에는 옥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있다. 별명은 ‘포옹의 호르몬’-불현듯 옆 사람을 껴안고 싶을때 “뇌하수체에서 옥시토닌이 분비되는 구나” 생각하면 과학적으로 맞다. 옥시토닌은 ‘가족 호르몬’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녀에게 포옹욕구를 줄 뿐 아니라 출산 때 자궁을 수축시켜 분만을 돕고, 아기가 울면 엄마에게서 저절로 젖이 나오게 하는 것이 이 호르몬이다. 가족 구성에 없어서는 안 될 호르몬이다.
그런데 이 호르몬의 또 다른 역할이 재미있다. 믿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 어린 새끼들이 어떻게 어미를 믿고 따라다닐까. 바로 옥시토닌 덕분이다.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서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게하고, 새끼들이 어미의 보호를 받게 유도하는 것이 옥시토닌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옥시토닌 호르몬을 코에 뿌렸더니 상대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진 연구결과가 있다. 한 몸처럼 믿는 마음이 있어 포옹도 하고, 믿는 마음이 없으면 껴안고 싶은 충동도 사라지는 것 - 그게 자연 현상인가 보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것만큼 든든한 힘은 없다. 믿고 받아주는 푸근함으로 우리는 정서적 안정을 얻고, 믿고 밀어주는 힘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바로 가정의 역할이다.
가정의 달에 까칠하게 조목조목 따지는 일은 잠시 덮어보자. “무슨 사연이 있겠지”하고 바보 같이 한번 믿어보자. 가족을 엮는 관계의 망이 아마 더 튼튼해질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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