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런가스키’라는 상당히 어려운 이름을 지난주 알게 되었다. 테드 쿨런가스키, 66세, 오리건 주지사이다. 타주 주지사는 특별히 뉴스를 타지 않는 한 이름을 알기 힘든 법인데 이번에 그가 특별히 뉴스를 타는 일이 있었다.
지난달 24일부터 한주동안 그는 전국의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뭘 먹는 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주지사 부부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선 장보기에는 취재진이 줄줄이 따라 붙었다. 닭 한 마리, 우유 한통, 오렌지 주스 한통, 계란 한줄, 식빵 한줄, 야채 몇 가지, 컵라면 … 바나나는 한 송이를 집었다가 두 개를 떼어내고 3개만 샀다. 일주일분 식비가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3달러로 먹고 살 수 있을까 - 오리건 주지사가 직접 실천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3달러는 오리건에서 푸드스탬프를 받는 빈민층의 평균 1일 식비이다. 빈곤 문제에 주민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 연방 정부가 관련 예산을 삭감하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한 의지로 주지사는 ‘가난 체험’을 자청했다.
여유 있는 자가 시험 삼아 한번 맛보는 가난과 정말 가난한 사람의 영혼까지 시린 가난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돈 없던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먹어보는 찌그러진 냄비의 라면은 낭만이지만 동전 세어서 끼니로 장만한 라면 한봉지는 눈물이다.
미국 사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소득에 따른 분리현상이다. 인종이나 성별이 더 이상 큰 벽이 되지 않는 반면 경제력이라는 벽은 철옹성처럼 점점 굳건해지고 있다. 주거지역이 소득에 따라 확실하게 분리되면서 부유층과 빈민층은 길가다 스칠 일도 없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차츰 상황이 비슷해서 강남의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이 종종 어리둥절해한다고 한다. 학교에서 ‘불우 이웃을 돕자’고 가르치는 데 그 아이들로서는 못 먹고 못 입는 불우 이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서 공동체 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이다. 오리건 주지사의 ‘가난 체험’은 정치인의 ‘쇼’의 성격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우리 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도록 자극을 준 효과는 있다. 같은 체험을 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수백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한 증거이다.
누구나 싫어하는 가난, 그 가난을 적극적으로 삶에 끌어들이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돈이 없어서 못 쓰는 생활이 빈곤·가난이라면 본인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가난’은 검약·청빈이 된다. 아직 큰 흐름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검약 움직임이 미국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다. 마구 사들이고 펑펑 쓰는 소비문화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난해 2월8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주민들은 단체로 새해 결심을 했다. 교사, 엔지니어, 하이텍 마케팅 담당 등 다양한 직업의 중산층인 이들은 “좀 덜 쓰고 살 수는 없을까? 소비문화가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년간 새 물건 안사기’ 결심이었다. 필요한 물건은 빌려 쓰고, 얻어 쓰고, 중고품 사서 쓰자는 것이다. 단 먹는 음식, 건강이나 안전에 필요한 물품, 내의는 예외이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샤핑은 즐거운 여가활동인데 그걸 갑자기 멈추자니 금단증상이 생기더라고 했다. 아울러 항상 중고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 저리 수소문 하느니 그냥 가서 새것을 사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 사서 고생하나” 싶은 이 모임이 그런데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다. 처음 50명이던 회원이 수천명으로 늘어나 각 지역 지부들이 생겼고, ‘새 물건 안사기’ 결심은 또 다른 1년으로 이어졌다.
되도록 물건을 안사며 살다보니 그런 생활이 주는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었던 결과이다. 샤핑과 소비라는 덫에서 벗어나니 홀연 찾아든 가벼움, 홀가분함이다. 모두가 기를 쓰고 달려가는 물질문명의 대열에서 슬쩍 빠져나와 갓길을 걸으며 즐기는 여유 같은 것이다.
질량불변의 법칙은 우리 삶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삶에서 소유를 덜어내면 뭔가 다른 것이 빈자리를 채운다. 물질만 쫓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존재의 풍성함이다. 맑은 바람, 따사로운 햇살만으로도 가슴이 기쁨으로 출렁이는 신비를 경험하고 싶다면 ‘가난 체험’이 한 방법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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